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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가 새물결]많아진 회의…금융자율 모색과정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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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서울 명동 은행연합회관 2층 국제회의실은 이제 '부도 재판정' 으로 불린다.

지난 4월28일 진로그룹 지원을 논의하기위한 첫 채권금융단 회의가 이곳에서 열린 이후 대농.기아등 부도유예 협약대상으로 적용되는 기업이 줄줄이 생겨나면서 부도위기에 몰린 기업의 운명을 결정하는 명소 (?)가 된 덕택이다.

회의가 열리는 날이면 주거래 은행장을 포함, 해당 기업에 돈을 꿔준 금융기관의 대표 수십여명이 모여든다.

기업의 회생 여부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칼자루를 쥔 사람들이지만 속마음이야 편할리 없는 노릇. 간혹 그룹 총수를 불러다 자구계획을 설명하게 하고, 미흡하다 싶으면 가차없이 몰아 붙이는 장면이 연출되기도 한다.

열렸다하면 6~7시간씩 계속되는 회의 시간에는 금융기관 대표들 간의 의견 교환이 활발히 이뤄진다.

부도설이 도는 기업에 대한 지원을 정부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꿔준 금융기관들이 모여 자율적으로 정하도록 한다는 것이 채권금융단 회의가 만들어진 취지다.

지난87년에도 '기업정상화를 위한 금융기관협정' 이 있었지만 실제 기업에 대한 생사여탈권이 없었다는 점에서 채권금융단 회의와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 금융계의 중평이다.

여신심사위원회도 올해 금융계에 새로운 풍속도를 가져온 또다른 '회의 제도' 로 꼽힌다.

수백억원 이상의 거액이 대출될 경우 여신및 자금담담 임원과 부서장등이 함께 모여 토론으로 정하자는 것이다.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찬반여부를 기록으로 남겨 책임 한계를 분명히 하는 방식이 동원되기도 한다.

현재 시중은행 대부분이 시행하고 있는 이 위원회제 하에서 은행장은 거부권만 지닐뿐 대출의사 결정과정에서 철저히 배제된다.

지난 7월부터 발효된 은행법 시행령에 따르면 은행장은 여신신심사위원회에서 부결된 사안에 대해 재심의를 요구할 수 없고, 승인된 사안에 대한 최종결제권도 가질 수 없게 되어 있다.

이처럼 은행장의 입김을 약화시킨 것은 한보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진 근본 원인이 은행장에게 집중된 과도한 대출권한 때문이었다는 분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은행장의 고유권한으로 간주돼온 인사도 '합의제' 로 바꿔가기 시작한 은행도 있다.

한일은행은 지난 5월부터 '승진심사위원회' 를 만들어 승진 여부를 판정한다.

부장급이하 직원들에 대해서는 은행장이 임명한 위원장등 5명으로 구성되는 위원회가 연수평점, 근무연수등 자료를 기준으로 적격자를 선정한다는 것이다.

올들어 금융계에 불기 시작한 이같은 '회의 바람' 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부정적 견해는 예를 들어 채권금융단 회의의 경우 개별 금융기관들의 이해가 엇갈리기 마련인데 과연 국민경제적 관점에서 바람직한 결론이 나올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과도기적 상황에서 나온 '책임 회피용' 이나 '전시용' 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반면 후한 점수를 주는 쪽은 금융기관 회의를 통한 의사결정 과정이 결국 자율적 금융질서 형성을 위한 토대가 될 것이라 믿는 사람들이다.

다소 진통이 있더라도 금융기관간의 합의가 '정부의 지침' 을 대신할 수 있어야만 진정한 자율화가 가능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러나 이같은 문제 해결 방식이 현 상황에서 최선이냐에 대해서는 이론이많다.

LG경제연구소 이인형 (李寅炯) 박사는 "최근 '신용공황' 에 대한 위기감이 증폭되고 있어 비생산적인 회의에 의존한 의사 결정 방식은 부담이 되고 있다" 고 말했다. 박장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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