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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치학회 서울대회 석학대담] 클라우스 오폐-박호성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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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세계정치학회 서울대회에 참가한 세계석학과의 릴레이 대담 세번째는 국가론의 세계적 대가인 독일 정치학자 클라우스 오페 (58.훔볼트대) 와 박호성 (서강대) 교수 사이에 이뤄졌다.

오페 교수는 '국가와 계급' 이라는 저서로 잘 알려져 있으며, 대담주제는 '21세기 자본주의의 전망' .

▶박 = 공산권의 붕괴가 정치이론가들에게 이론적 동요를 불러일으켰다.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서 자주 논의되어왔었다.

공산권의 붕괴가 귀하의 이론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

▶오페 = 공산주의 붕괴를 계기로 나는 새롭게 대두하는 '근대적 현상' 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근대적 현상이란 한 국가 내부에서 갈등과 분규로 형제애가 상실되는 등 정체성의 위기로 요약될 수 있다. 동유럽뿐 아니라 내전이 없었던 서유럽에서도 소수민족과 여성문제 등이 심각하게 잔존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나의 형제애로 단합.연대하여 일체감을 갖는 인륜적 '문명사회' , 이 개념은 내가 만든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 나는 상당히 탐닉하고 있다. 국가에 의한 불필요한 강압없이 법의 공평한 지배하에 형제애로 뭉쳐진 일체감을 형성한 사회, 동유럽은 이런 문명사회가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국가중심의 관점에서 문명사회개념으로 옮겨가는 계기가 됐다.

▶박 = 요즘 너무 자주 세계화 이야기들을 한다.

개인적으로는 마치 지난 세기말처럼 새로운 제국주의시대가 도래할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공산권의 붕괴로 자본주의세계의 '공동 적' 이 사라졌다. 공동 적이 소멸함으로써 자본주의국가들 상호간의 대립적 갈등과 충돌이 멀지 않아 전개되리라 생각한다. 근래 미국.일본.이탈리아, 그리고 한국 등 세계적 차원에서 전개되는 개혁정책도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그것은 공산주의를 극복.타파하기 위한 이유로 외면해왔던 개별 국가 내부의 갈등을 치유하기 위한 세계적 움직임으로 나타난 것이다.

또 앞으로 야기될지 모르는 자본주의 국가 상호간의 대립.갈등에 대처하기 위한 내부적 준비과정이라 할 수도 있다. 이른바 세계화 이데올로기는 세계동포주의 같은 것이 아니라 국제주의의 이름을 빌린 적대적 민족주의를 관철시키려는 이념이라 생각한다.

▶오페 = 세계화로 다양한 개인적.민족적 가치들은 이제 단일화된 시장으로 통합되고 있다.

경제.문화.학문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발전된 국가와 저발전국가 사이에도 역사상 처음 효율적인 경쟁상태가 만들어졌다. 노동력 사이의 국경없는 경쟁이 나타나고 민족국가중심의 정책은 변질되고 있다. 정치의 도덕적 기준까지 흔들리고 있다.

인권.노동권.환경보호 등이 경제발전의 장애물로 인식돼 더 이상 듣기 어려운 개념으로 전락하고 있다.

'구조적 비양심성' 이 지배하는 분위기여서 정치는 이제 무기력해졌다. 국가가 당연히 앞장서 해결해야 할 인륜적 과제인 국민복지의 증진, 문화적 의사소통의 활성화 등을 포기함으로써 탈국가현상 역시 가속화되고 있다.

▶박 = 냉전체제의 소멸로 국가의 역할이 감소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와 아울러 세계화를 이야기하면서 작은 정부론을 주장하는 논자들이 많다.

그러면서도 경쟁력 있고 강력한 정부를 기대하고 있다. 이것은 사실 아직 해결해야 할 수많은 근대국가의 과제를 포기하는 것이 될 수 있지 않은가.

▶오페 = 형제애에 기초한 집단적 연대의식을 회복해서 '문명사회' 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정당한 국가기능의 회복이 필요하다.

현재 민주주의의 과제는 이같은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 국가에 이의를 제기하고 항의하는 것이다.

문명사회를 위협하는 정부는 민주정부라고 할 수 없다. 민주주의와 복지국가에 대한 위협이 유럽 전역에서 가장 심각하게 제기되는 문제라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건강보호.교육.일할 권리.사회적 안정을 보편화하기 위해 노동조합의 활성화를 보장해야 한다.

이런 점은 노동권리를 제한받고 있는 한국도 예외일 수 없다. 국제적 억압에 저항하고 민주주의적 권리를 방어하고 연대의식을 활성화하기 위한 '사회적 약관 (約款)' 이 필요하다. 이런 것을 앞장서 해야 하는 것이 국가의 기능이자 도덕적 요청이다.

▶박 = 미래 한국을 위한 내 개인적인 이론적.정치적 과제는 한마디로 '시민 참여와 국민복지 확대로 민족통일을' 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한국에는 독일의 분단체험에서 민족적 교훈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다. 독일은 통일의 역사가 고작 분단 이전까지 70여년에 불과한 반면, 우리는 1천년이 넘는다. 따라서 통일지지자가 소수에 불과했던 독일과 달리 우리의 경우 거의 모든 국민이 통일을 원한다.

▶오페 = 독일통일은 특수한 경우이기 때문에 모범사례가 될 수 없다. 특별히 한국지식인들이 통일을 얼마나, 왜 원하는지 궁금하다.

꼭 민족통일이 되지 않더라도 자유롭게 왕래가 이뤄질 수 있다면 괜찮은 것 아닌가.

민족주의는 민족적 침략과 파멸의 힘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민족주의의 이런 점을 신중히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박 = 물론 전지전능한 이데올로기는 없다.

하지만 일정한 시대적 사명을 가진 이념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차원에서 민족통일을 갈구하는 한국 민족주의를 이해할 여지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정리 = 김창호 학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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