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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 웅크린 기업들 ‘현금’ 집착 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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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이달 초 열린 동양그룹 임원회의. ‘경기 회복이 언제쯤 될 것인가’라는 브리핑이 먼저 있었다고 한다.

‘세계 경제는 기본적으로 미국의 금융위기가 끝나야 회복할 수 있다. 미국은 국내총생산(GDP)의 약 70%를 차지하는 소비에 가장 큰 문제가 있다. 주택·주식 등 개인 자산가치 하락이 한계를 넘어서 이제 소비를 살리기에는 백약이 무효인 상태다. ‘경기가 언제 회복될 것이냐’를 전망하는 것 자체가 지금으로선 의미가 없다’.

이날 참석한 임원들은 브리핑이 끝난 뒤 토론을 벌였다. 결론은 지금은 무엇보다 중장기적인 생존 전략을 짤 때라고 입을 모았다고 한다. 최근 대부분의 기업이 경기 회복이 언제쯤 이뤄질지를 놓고 촉각을 곤두세운 채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다.

◆경기 회복 시점 논쟁 뜨거워=지난달 말 열린 삼성 사장단회의에서도 경기 회복이 언제쯤 이뤄질지를 놓고 장시간 논의했다. 이 자리에는 현정택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까지 초청해 경기 회복 전망을 들었다. 현 원장이 각국 정부 등 공식 기관들이 내년 이후 경기가 회복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뒤 삼성 사장단들은 논의를 했다.


세계적 금융위기가 극심했던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기업들은 늦어도 올 하반기께엔 회복세를 탈 것으로 막연한 기대를 한 것도 사실이다. 올해부터는 적극적으로 투자를 하겠다고 공언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변동성이 다시 불거지면서 불확실성이 더 커져 기업들은 경영예측을 하기 힘들다는 목소리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기업들은 미래를 위한 투자를 중단한 채 인력 채용도 머뭇거리고 있다.

국내 주요 기업 30개 업체를 설문조사한 결과 17개 업체가 내년 이후에나 경기 회복이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KT 경영연구소의 김희윤 박사는 “글로벌 측면에서 보면 국가 간 경제 회복 공조가 잘될 수 있는 기간을 1년으로 볼 수 있고, 국내 측면에서도 정부가 적극적인 부양책을 시도하고 있지만 원만한 성장을 하려면 1년 이상은 걸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생존을 위한 현금 쌓아두기=“진짜 내 손에 현금을 쥐고 있어야지 안 되겠더라. 요즘은 천둥벼락을 맞아도 끄떡없는 재무구조가 돼야 자금난 소문이 없어지는 것 같더라.”

심심찮게 자금난 풍문이 돌고 있는 모 그룹 회장이 최근 사석에서 한 말이다. 그는 현금을 확보하기 위해 계열사를 매각할 계획이지만 아직도 팔지 못했다. 기업들은 지금은 현금 확보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김종갑 하이닉스 사장은 “올해도 불확실성이 커 시장을 예측하기 어려운 만큼 재무 안정성을 강화하고 ‘현금흐름 중심’ 경영으로 최악의 경영 환경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두산그룹 등 주요 대기업이 잇따라 회사채 발행을 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대기업들은 계열사별로 1조~2조원의 현금(현금성 자산 포함)이 있다. 4분기 실적이 나쁘기는 했지만 아직 주요 대기업이 각종 부동산, 유가증권 등의 형태로 가지고 있는 자산은 적지 않다. 삼성전자가 6조원대, 현대중공업과 SK텔레콤이 1조원대의 현금을 보유한 것을 비롯해 이들이 필요하다고 판단할 때 동원할 수 있는 자금은 상당하다. 익명을 요구한 D그룹 관계자는 “불황이 언제 끝날지 몰라 자금 확보에 나서지 않을 수 없다”며 “경기 회복이 가시화되면 돈을 풀고 투자에 나설 수 있다”고 말했다.

김창규·문병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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