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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키코 사태, 법과 정책 균형 맞춰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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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미국발 금융위기가 축발한 경제 한파로 전 세계는 사상 유례없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가경제는 물론 가계와 기업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수십년 법학을 전공해온 필자는 경제위기 해결책이 어떠해야 하는지 그리 잘 알지 못 한다. 다만 작금의 경제 상황 속에서 줄을 잇는 법적 분쟁들을 보면서, 위기 상황에서도 해법은 결국 법의 원칙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최근 키코(KIKO)라는 생소한 단어가 큰 이슈가 되고 있다. 은행들과 일종의 선물환 거래인 키코 계약을 한 수출 중소기업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지난해의 달러 폭등으로 큰 손실을 입을 것이라는 우려와 함께 등장한 이 용어는 소위 ‘키코 사태’로 증폭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지난 연말 법원이 한 기업의 주장을 받아들여 키코 계약의 효력을 일부 정지한다는 가처분결정을 하자, 기업들이 은행들을 상대로 집단소송을 제기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경제위기를 이유로 계약의 효력을 다투는 현상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원화 가치 폭락으로 손해를 본 펀드 가입자, 엔화 차입자, 환변동보험 가입자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체결한 계약의 효력을 부인하는 소송을 제기하면서 ‘경제 위기 속의 소송대란’이라는 기현상을 빚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계약은 지켜져야 한다(Pacta sund servanda)’는 법의 기본 원칙이 흔들릴 수도 있다는 우려를 낳게 한다. 혹시라도 모럴 해저드 현상이 벌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기우도 든다.

이런 과정을 지켜보면서 필자는 원칙에 따른 해결이 중요하다는 순리를 새삼 느낀다. 정책 당국과 법원, 그리고 당사자인 은행과 기업이 각자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고 법과 원칙을 지키면서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이것만이 위기를 순리로 현명하게 극복하는 길로 보인다.

먼저, 소송 사건을 해결해야 할 법원은 여론과 시류에 흔들림 없이 법과 원칙에 따라 각각의 소송 사건별로 사실관계를 냉철하게 보고 보편적 기준에 맞는 법리를 합리적으로 적용해 신중히 판결해야 한다고 본다. 혹시라도 경제위기에 따른 일시적인 여론에 편승하거나 어느 한쪽의 사정에만 귀를 기울이면 법과 원칙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게 된다. 이는 도덕적 해이를 불러오고, 금융질서와 준법정신을 무너뜨려 국가 전체의 손해가 될 수 있다. 위기를 피한다고 법의 기본 원칙을 무시해선 곤란하다. 사태의 근원적인 해결 방법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계약을 기반으로 하는 거래질서를 혼란하게 함으로써 모두의 이익을 희생시키기 때문이다. 해외투자자나 거래 상대방이 한국 기업이나 경제 시스템의 계약 준수 의지에 불신을 품게 해 국제적 신인도가 저하될 위험도 있다.

 그러나 키코 사태는 계약이나 법 논리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 키코 사태에 휩쓸려 어려움을 겪는 상당수 기업이 수출 역군인 중소기업들로, 이들은 수출의 최전선에서 싸우는 우리 경제의 첨병이다. 예측하기 힘들었던 경제위기에 처한 이들 기업에 대해 법 논리만을 들어 그 어려움을 외면하는 것은 국가 백년대계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해결책은 정책당국과 정치권 몫이라고 본다. 법적 판단은 법원에 맡기되, 이와는 별개로 정부와 정치권은 기업에 대한 지원이 충분하고 적절한 것인지 신속히 검토해 정책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 금융정책이 해결해야 할 일을 법원에 미루는 듯한 모양새를 보여서는 안 된다. 은행 입장에서도 해당 기업은 앞으로도 함께 상생해야 할 파트너라는 점을 인식해 지원 방안을 적극적으로 강구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키코 사태를 슬기롭게 해결하기 위해서는 상황을 대국적으로 보는 자세와 함께 법과 원칙 위에서 옥석(玉石)을 세심하게 분간하는 안목이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김문환 국민대 법대 교수·전 한국상사법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