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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하이닉스 외면한 시장 …우리가 가장 잘 할 수 있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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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호 24면

박용인 동부하이텍 사장

“미쳐도 한참 미쳤다.” 2006년 말 미국 반도체 회사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가 박용인 비즈니스 매니저의 사표 제출에 보인 반응이다. 이른바 ‘출세 길’이 열려 있는데 왜 팽개치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네 식구를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2007년 동부하이텍 부사장에 기용된 그는 지난달 이 회사 반도체 총괄사장으로 승진했다.

박용인 동부하이텍 사장의 ‘아날로그 반도체’론

박 사장의 주특기는 아날로그 신호와 디지털 부호를 전환해 주는 혼합신호(Mixed-signal) 반도체다. 연세대 전자공학과를 나와 LG반도체(87년), TI(99년)에 근무하면서 아날로그 반도체 개발이라는 한길을 걸어왔다. 관련 세계 특허를 28개나 갖고 있다. 박 사장이 개발을 주도한 ‘데이터 컨버터 프로그램(DAP)’ 덕분에 TI는 5%대이던 이 분야 시장점유율을 25%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TI로선 보배를 잃고 동부로선 진주를 캔 셈이다. 그래서 그가 동부 반도체 사령탑에 오르면서 외친 일성도 ‘아날로그 반도체’다. 마흔다섯의 젊은 CEO를 18일 만났다. 1m90cm의 장신인 그는 시종 무뚝뚝한 표정이었지만 진지하게 답변했다.

-아날로그 반도체라는 용어가 생소하다.
“한국이 유독 약한 분야여서 그렇다. 삼성전자나 하이닉스반도체는 메모리 분야의 강자다. 그러나 휴대전화·가전·자동차에 들어가는 아날로그 반도체는 연간 200억 달러 넘게 수입하고 있다. 메모리와 비메모리 사업 비중을 보면 한국은 86대14로 심각한 불균형 상태다.”

박 사장은 메모리와 아날로그 반도체를 대포와 소총에 비유했다. 메모리가 수조원대 투자를 통한 양산기술이 중요하다면 아날로그는 설계·공정기술이 핵심이란 얘기다. 그는 “전쟁에서 이기려면 대포 화력은 물론 소총수도 뛰어나야 한다”며 “동부가 훌륭한 소총수가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동부가 찾은 새로운 길이 왜 아날로그 반도체인가.
“비즈니스에서 성공하는 비결은 간단하다. 잘할 수 있는 사업을 선택하면 된다. 아무리 폼 나 보이고 전망 있는 분야라도 내가 잘할 수 없으면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지난 10년간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수업료도 많이 치렀지만 동부는 자연스럽게 아날로그 반도체 관련 기술을 체득했다. 아날로그 반도체는 동부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비즈니스다. 마진도 좋다. TI·아날로그디바이스·나쇼날 같은 회사가 업계 선두주자인데 매출이익률이 40%가 넘는다. 그래서 이쪽 선수들은 (아날로그 반도체를) ‘조용히 번성하고 있는 시장’이라고 부른다.”

-동부는 자금력이 열세고 고객 기반이 취약하다고 평가 받는다.
“(아날로그 반도체는) 유별나게 대규모 자금을 투자하지 않아도 된다. 설비투자는 이미 끝났다. 아날로그 반도체의 경쟁력은 사람이다. 소자·공정기술이 중요하다. 동부는 불량률이 1% 미만이다.”

과연 동부가 그런 실력이 있느냐고 되묻자 박 사장은 조그만 넥타이핀을 기자 앞에 내밀었다. 동부가 LG디스플레이에 공급 중인 LDI칩이 넥타이핀에 박혀 있었다. 가로 12㎜, 세로 0.8㎜짜리 앙증맞은 반도체다. 박 사장은 “LCD TV에 들어가 화질을 조정해 주는 부품”이라며 “기존 제품보다 크기를 30% 줄인 것”이라고 자랑했다. “같은 크기의 웨이퍼에서 칩이 30% 더 나오니까 그만큼 원가 경쟁력이 높다. 경쟁사에서 5년 걸린다던 일을 동부는 1년 반 만에 해냈다.”

-‘사람’이 곧 경쟁력이라고 했는데.
“맥아더 장군은 핵심 포스트에 유능한 리더 10명만 있으면 백전백승한다고 했다. 이 말은 기업에도 적용된다. 동부는 지난해 이후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비메모리 전문가 10여 명을 스카우트했다. 그중에는 반도체 공정기술 세계 1인자인 루 후터 부사장도 포함돼 있다.”

-최고 인재는 어떻게 데려왔나.
“그들은 단순히 돈을 더 주겠다고 해서 움직이지 않는다. ‘당신이 꿈꾸던 일을 하게 해 주겠다’고 말했다. 능력 있고 자신감 있으면 ‘백지’ 그대로 맡기겠다고 보증했다. 단 고생할 각오는 단단히 해야 한다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

-동부는 반도체와 궁합이 맞나.
“동부에는 삼성 출신, LG 출신, 하이닉스 출신, 외국계 출신이 섞여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자기 ‘고향(출신)’의 장점을 섭취해 동부맨으로 섞이는 재주가 있더라. 놀랄 정도로 흡수력이 강하다.”

-지난해 말 임직원 임금을 30% 깎았다.
“그런 결정을 내리기까지 2개월이 걸렸다. (인력 구조조정으로) 10년간 고생한 2500여 임직원을 내보내고 싶지 않았다. 처음엔 차장급 이상만 임금을 줄일 방침이었는데 평사원도 동의해줘 놀랍고 고마웠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로 봐 달라. 그래서라도 더더욱 (동부 반도체가) 꽃피는 것을 보고 싶다.”

-언제가 꽃피는 시기인가.
“2010년 매출이익률 10%를 낸다는 목표를 세웠다. 간단히 말해 ‘텐·텐’이다.”

-목표가 과도해 보인다. 지금은 끝 모를 경제위기 상황인데.
“세 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개발에서 양산까지 한번에 성공하고, 설계 과정부터 고객사와 파트너십을 맺으며, 이런 과정을 초스피드로 진행한다는 것이다. 어렵지만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너무 자신감이 앞서는 거 아닌가.
“장담할 수 없지만 분명한 건 지금이 기회라는 사실이다. 세계적 경제 한파로 반도체 회사가 많이 어렵다. 이게 우리에게는 절호의 기회다. 반도체 공장이 문 닫는다는 뉴스가 나오면 동부는 즉시 영업사원을 보낸다. 내년께 엄청난 기회가 올 것이다. 준비가 안 돼 있으면 팔짱 끼고 구경만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쯤에서 화제를 돌렸다. TI의 핵심 인재였던 그는 왜 귀국을 결심했을까.

“엉뚱한 얘기를 해야겠다. 텍사스주 댈러스 한인학교에서 8년간 봉사를 했다. 정말 헌신적으로 일했다. 이 기간 80명이던 학생이 500명으로 불어났다. 소수민족 이민 사회에서는 ‘작은 기적’이었다. 이런 일을 한국에서도 하고 싶었다. 2006년 컨설턴트 신분으로 동부 반도체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말단 여직원들의 눈빛에서 ‘희망’을 읽었다. 그래서 급여도, 지위도 묻지 않고 한국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이 기사 취재·작성에는 이아람(서울여대 국문 3) 인턴기자가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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