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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Sunday] 정치 코미디 vs 코미디 정치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02호 35면

미국 NBC의 코미디 드라마 ‘30록(Rock)’은 지난해 에미상 시상식에서 작품·각본·남녀주연 등 주요 4개 상을 휩쓸었다. 올 초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도 작품·남녀주연 등 TV 코미디 부문의 상을 두루 받았다. 시청률은 몰라도, 비평가들 눈에는 요즘 최고의 코미디라는 얘기다. 국내 케이블TV에서도 방영 중이다.

이 드라마의 주 무대는 코미디쇼를 만드는 미 방송사다. NBC가 실명 그대로 등장한다. ‘30록’이라는 제목 역시 NBC가 있는 뉴욕 맨해튼의 록펠러센터 건물 번호에서 따 왔다. 여주인공은 코미디쇼를 책임지는 작가 리즈 레몬(티나 페이)이다. 남주인공은 방송사 최고경영자로 부임한 잭 도나기(앨릭 볼드윈)다. 성향이 전혀 다른 두 캐릭터가 충돌하고 협력하면서 재미난 일들이 거듭된다.

NBC를 소유한 거대기업 GE 역시 실명으로 나온다. 흥미로운 건 그 방식이다. 방송사와 사뭇 다른 GE의 기업문화를 이 드라마는 웃음의 소재로 한껏 활용한다. 모기업뿐이 아니다. 경영자 잭 도나기는 친(親)공화당의 보수파이고, 방송작가 리즈 레몬은 자유주의 성향으로 나온다. 이를 빗대면서 정치적 이슈나 정치인들을 웃음거리로 만든다.

유명 정치인들의 실명을 대사에 언급하기도 한다. 연예인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극중 코미디쇼의 남녀 스타는 겉멋만 잔뜩 들고, 머릿속에 든 게 없는 캐릭터로 나온다. 경쟁적으로 어이없는 일을 저질러 웃음을 터트리게 한다. 한마디로 ‘30록’에는 소재의 성역이 없다. 당사자들은 뭐라 할지 몰라도, 적어도 바다 건너 시청자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미국의 대표적인 코미디쇼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SNL)’는 이를 능가한다. 이 프로는 미 대선이 있는 해마다 시청률이 올라가는 전통이 있다. 정치인과 그들의 주장을 비틀어 웃음거리로 만든다. 대선이라는 국민적 관심사는 더할 나위 없는 코미디 호재가 된다. 유명 정치인들이 직접 출연하는 것도 다반사다.

지난해 대선 때도 그랬다. 특히 티나 페이의 공이 컸다. 그는 ‘30록’ 이전에 SNL에서 코미디 작가이자 배우로 활동했다. 게다가 얼굴은 세라 페일린과 아주 닮았다. 무명의 알래스카 주지사에서 일약 공화당 부통령 후보로 부상한 페일린의 인기와 언행을 SNL이 놓칠 리 없다. 페일린을 희화화한 티나 페이의 활약은 이 프로의 시청률 상승에 크게 기여했다. 인터넷 동영상으로도 인기를 끌었다.

페일린으로 분장한(사실 분장할 필요도 별로 없지만) 티나 페이는 당시 공화당 대통령 후보인 존 매케인과 나란히 출연했음은 물론이다. 나중에는 페일린 자신도 직접 출연했다. 한국의 정치 문화와 TV 코미디쇼에선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민주화 열기가 뜨거웠던 1987년 말 당시 노태우 대통령 당선자는 “나를 코미디 소재로 삼아도 좋다”고 약속했다. 한 방송사의 배우·코미디언들과 만난 자리에서였다. 그러면서 “앞으로 연예 분야에 성역이란 있을 수 없다” “소재를 완전히 개방해 자유롭게 활동해도 좋다”고 말했다.

이후 20여 년간 우리 사회는 각 분야가 다양한 민주화의 성과를 일궈냈다. 그러나 코미디 분야는 아직 예외인 것 같다. 특히 지상파 TV에선 정치 소재 코미디가 여전히 금단의 영역처럼 느껴진다. 현직 대통령의 말투를 흉내 내기 힘들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 한때 붐을 이루던 역대 대통령의 성대모사조차 보기 힘들다.

누구의 책임인가. 코미디 배우가 아니라 정치인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다. 혹시 정치인들이 코미디 같은 일들을 직접 벌이는 탓에 정치 코미디를 시도할 의욕마저 잃게 한 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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