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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 아파트의, 아파트에 의한,아파트를 위한 한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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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아파트에 미치다
전상인 지음, 이숲, 200쪽, 1만2000원

“아니, 아파트에 이런 깊은 뜻이….”

제목은 도발적이지만 제법 진지한 학술서다. 말하자면 한국의 아파트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인문사회과학적 보고서랄까. 그런데 딱딱하기는커녕 재미있다. 이제는 잊혀진 일화와 새로운 시각이 넘쳐나서다. 도대체 대통령이 준공식에 참석해 “본 (마포)아파트가 혁명한국의 한 상징이 되기를 바란다”는 축사를 했음에도 입주 희망자가 적어, 안전성을 입증하기 위해 몰모트 실험에 인체실험까지 했던 사실을 기억하는 이가 몇이나 될까. 와우 아파트 붕괴사건을 만회하기 위해 아파트 이름에 ‘시범’을 넣었으며 그 중 1971년 여의도 시범아파트에선 입주 초기 엘리베이터 걸을 두고 중장년 입주자들에게 사용법을 설명했었다는 사실도 그렇다.

어쨌거나 지은이에 따르면 아파트는 단순한 주거공간이 아니다. 우리의 삶, 사고방식, 문화는 물론 사회구조며 정치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한국사회를 들여다 보는 내시경 구실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예를 들면 아파트로 인한 가족 내부의 권력변화에 주목한 ‘아파트 공간의 가족정치’를 보자. 아파트는 남녀평등에 기여했단다. 전통주택에서는 사람이 붙박이고 밥상이나 다기 같은 가구를 옮겨가며 썼는데 대체로 운반자는 여성이어서 자연스레 남성이 여성의 상전이 되었다. 하지만 아파트 생활에서는 소파나 식탁 의자 등 ‘신체가구’가 일상화되었고 남성도 이를 이용하려면 스스로 이동해야 한다. 때문에 남녀노소 불문하고 가족구성원 모두 상대적으로 평등해졌다는 설명이다. 여기에 남편의 수입을 훨씬 능가하는 소득을 올린 복부인들이 늘면서, 또 문단속이 쉬워져 주부의 나들이가 잦아지면서 ‘안사람’이란 표현이 의미를 잃게 됐다는 말을 들으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90년대 말 이후 우리나라 여성의 자궁경부암이 급속히 감소한 것이 아파트 거주 확산에 따라 샤워나 목욕이 일상화한 덕분이란 대목도 마찬가지다.

지은이는 아파트가 부의 원천이자 사회적 신분의 척도가 된 상황에도 주목한다. 우리나라에서 가구당 총자산 가운데 부동산 비율이 76.8%로 미국 등에 비해 월등히 높은 이유가 있다고 한다. 70년대 아파트 공급이 확대되던 무렵 금융자본은 공업개발에 집중되고 사회보장제도는 존재하지 않는 형편에선 장래에 대비한 목돈을 마련하는 수단으로는 아파트만한 게 없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압축성장에 힘입어 ‘부동산 불패신화’가 이어졌으니 아파트 투기를 단순히 비뚤어진 개인심성 탓으로 돌리기엔 무리라고 풀어준다. 요컨대 국가정책과 사회환경 탓이 컸다는 것이다. 또한 주택의 가치를 쉽게 계량화할 수 있는 아파트가 주거문화의 주류가 되면서 아파트 평수와 자녀들의 성적(등수)으로 사회를 서열화하는 ‘한국식 평· 등주의(坪· 等主義)가 자리잡았다는 흥미로운 설명도 들려준다.

무엇보다 아파트가 한국사회의 좌경화를 막는 데 일조했다는 ‘아파트와 이데올로기’에 눈길이 끌린다. 급속한 산업화 및 도시화 과정에서 빚어진 주택난에 정부는 아파트 공급이란 물량공세로 대응했는데 아파트 구조상 거주자들은 가족주의와 개인주의 가치관에 친숙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에 따라 ‘집 한 채가 재산의 전부’인 나라에서 아파트거주민은 자본주의와 가족주의가 접합된 중산층 이데올로기의 최대 온상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지은이는 이들이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포함한 몇 차례의 계급적 위기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가 자본주의 체제를 전면적으로 거부하거나 사회주의혁명을 추구하지 않도록 하는 방파제 구실을 했으리라고 조심스레 추측한다.

그렇다면 지은이는 ‘아파트 한국’의 미래를 어떻게 볼까. 우선 일시적인 가격변화에도 불구하고 아파트의 고가행진은 계속될 것이란다. 고급 아파트 거주가 현대 한국인에게 중산층 이상이 되기 위한 자격증 같은 것이 되었기에 “전국민의 60% 이상이 40평대에 살게되는 그날까지” 아파트 전성시대는 계속되리란 근거에서다. 그러나 단서가 있다. 당장 젊은 세대가 내 평생 내 힘으로 내 집 하나 마련할 꿈이 아스라이 멀어지는 상황이 계속된다면 좌파 포퓰리즘의 온상이 마련되리란 잿빛 전망도 함께 내어놓는다. 그러니 대한민국 체제의 안정적 확대재생산을 담보하기 위해서라도 주택정책은 확실히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 책의 결론이다.

지은이는 현재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교수로 머리말에서 삶의 현장에 밀접한 학문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 흥미롭고 유익한 책을 보면 그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된 듯하다.

김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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