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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능 레저연출가 G.O.의 세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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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생각해보자. 직장 위치는 맑고 푸른 바다와 새하얀 모래밭 옆에 있는 그림같은 목조 호텔. 하는 일은 처음 만난 사람들과 아침부터 밤까지 같이 놀아주기. 여기다 거저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준다.

쳇바퀴같은 일상에 찌들린 봉급쟁이들이라면 대번에 귀가 번쩍 뜨일 소리다.

그런 직업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고?

있다.

전세계 1백18곳에 휴양시설을 운영하고 있는 클럽 메드. G.O. (Gentle Organizer) 라고 불리는 이곳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이 바로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지난달 24일 본지 레저면 단신란에는 아주 짤막한 기사가 실렸다.

'아시아 지역에서 근무할 G.O.모집. 전화 771 - 8977' . 이 한줄짜리 단신에 서울 소공동 클럽 메드 사무실은 몰려드는 문의전화로 며칠간 업무가 마비됐다.

사우디에서 일한 경험이 도움이 되느냐는 40대 아저씨부터 아이들이 다 커서 뭔가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다는 아줌마까지. 지난해보다 한층 어려워진 취업난을 실감할 수 있었다는 클럽 메드 한국지사장 안설영씨는 수백통의 전화문의자중 이미 1백50여명이 자기소개서를 냈으며 이중 대부분이 외국 어학연수 경험이 있는 고학력자들이라고 귀뜸했다.

지원자중 하나인 회사원 김모 (25) 양. 서울의 명문대 일문과를 졸업하고 9개월간의 영국 연수를 거쳐 현재 외국인 법률회사에 근무중이다.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괜찮아 보이는 직장을 떠날 생각을 하게 했을까. "지금 하는 일도 재미있어요. 보수도 괜찮고. 하지만 이런 일은 몇년 지나면 하고싶어도 할 수 없잖아요. 젊었을 때 새로운 경험을 쌓고 싶어 지원했어요. 부모님들은 아직 모르시지만 합격만 되면 충분히 설득할 수 있어요. " 클럽 메드가 주장하는 G.O.의 매력 네가지. 하나, 무엇보다 세계 각국 사람들과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만나, 자신도 즐기면서 문화적 교류를 나눌 수 있다.

둘, 외국에서 주로 외국인들과 생활해야 하니 자연스럽게 외국어 실력이 늘어난다.

셋, 각양각색의 손님들을 즐겁게 해줘야 하니 대인관계가 원만해질 수밖에 없다.

넷,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전달자라는 사명감이 무럭무럭 생긴다.

요즘 젊은 세대가 선호하는 요건은 고루 갖추고 있는 셈이다.

회사쪽 요구 조건은 30세 미만으로 외국어에 능통한 미혼자. 일정수준 이상의 외모와 체력, 적극적이고 낙천적인 성격도 필수조건이다.

하지만 세상 일이 어디 그리 쉬운가.

하는 일이 '놀아주는' 것이라곤 하나, 아무리 재미있는 일이라도 일단 직업이 되면 그 순간부터 골치아파지는 게 세상이치 아닌가.

G.O.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과연 그냥 놀고 먹는 것일까. 우선 하루 스케줄을 보자. 보통 아침8시 전후부터 저녁5시까지는 각자 맡은 일을 한다.

일반 호텔처럼 손님맞이.은행.상점근무등 부서는 다양하지만 원칙은 하나다.

손님이 편하고 즐겁도록 도와주는 것. 일과가 끝나면 손님들과 함께 즐기는 각종 공연, 디스코 경연대회등 본격적인 파티가 밤11시 정도까지 계속된다.

손님이 새벽에 도착하거나 떠날 때는 언제라도 이들을 영접 또는 환송해야 한다.

이런 일과가 매일 이어진다.

다시 말해 일요일이 없다.

한 시즌 (6개월) 동안 이런 고된 생활이 매일 계속된다.

그래서 노는 일을 즐기지 못하고 또 철저한 체력관리를 못하면 버티기 힘들다.

"이 일은 누가 시켜서는 절대로 못하는 일입니다.

본인 스스로 재미있어서 그냥 즐겨야죠. 마냥 논다는 환상은 절대 금물이지만 단순히 일이라고만 생각해도 곤란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일과 놀이를 동일시하지 못하는데 이 '즐긴다' 는 개념을 빨리 터득하는게 관건이죠. " 지난해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10개월간 근무했고 지금은 소피텔 독산점 홍보실에서 근무하는 문창현 (27) 씨는 낮잠을 꼭 1~2시간 자두는 것이 요령이라고 덧붙인다.

이렇게 한 시즌 (여름시즌 : 5월1일~10월31일, 겨울시즌 : 11월1일~4월30일) 이 끝날 때마다 2주간의 휴가가 주어진다.

1년중 한달이 휴가인 셈이다.

1년이 지나면 다른 빌리지로 이동한다.

보수는 적다.

초봉이 한달에 미화 5백달러 (약 40만원선) .3년정도 지나면 1천달러 정도를 받게된다.

그래서 '돈을' 번다기보다 '돈도' 번다고 생각해야 뱃속이 편하다.

G.O.두명마다 작은 침실이 두개 있는 룸 하나가 배정된다.

거실과 욕실, 화장실은 공용. 부엌은 없다.

식사시간에 식당에 가면 바로 식사할 수 있다.

현재 전세계 1만1천여 G.O.중 한국인은 27명. 한 빌리지당 보통 1백명씩 근무하는데 한국인 G.O.들은 한국 관광객들이 자주 오는 아시아권에 배치된다.

92년 클럽 메드가 처음 국내에 선보였을 당시 1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많이 늘었다.

이중 남자는 7명, 여자가 20명이다.

올해는 15명을 뽑을 예정인데 현재 10명이 그만둘 예정이니 총 32명이 되는 셈이다.

여유롭게 살아가는 서구인들에게 G.O.는 이미 인기직종이다.

클럽 메드의 본거지인 프랑스에서는 매년 5천명 모집에 20만명이 몰린다고 한다.

하지만 아시아에서는 아직 인지도와 선호도가 떨어지는 편이다.

노는게 일하는 것이라는 개념이 생소하기도하고 G.O.경력은 안정된 직장을 구하기 위한 기초경력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성취욕 강한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더욱 그렇다.

남자 G.O.가 적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94년부터 G.O.로 일하고 있는 신남숙 (29) 씨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10월 오픈되는 인도네시아 반탄 근무를 앞두고 국내 체류중인 그녀는 부모와 함께 온 어린이들을 돌봐 주는 미니클럽을 맡고 있는데 3년쯤 되니 슬슬 팀장에 대한 욕심도 생긴다고 한다.

하지만 클럽 메드에서 승진하기 위해서는 실무능력 외에 최소한 3개 국어를 해야 한다.

영어.불어는 필수고 아시아쪽 근무를 위해서는 일본어도 해야 한다.

그래서 내심 외국어 공부에 매진할 생각이다.

놀기가 싫어질 때는 새로운 놀거리를 개발하고 어떤 손님과 마찰이 생기면 다른 손님들에게 더욱 잘한다는 것은 신씨뿐만이 아닌 모든 G.O.들의 스트레스 해소법이다.

정형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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