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을 뛰어넘는 자유의 세계-토니 크랙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8면

미술에서 현대가 등장한 것은 1907년이다.

피카소가 '아비뇽의 처녀들' 을 그린 해다.

5명의 누드 여인을 그린 '아비뇽의 처녀들' 은 기존의 미술을 깨뜨리는 충격으로 현대의 개막을 알렸다.

볼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평면적인 육체처리와 날카로운 윤곽선은 이전의 미술에서는 분명 상상할 수 없었던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깜짝놀랄 만한 일은 이 그림속에 등장하는 불가사의한 얼굴에 있었다.

광대뼈 밑으로 처져있는 눈, 그리고 뺨 옆으로 돌아가 달라붙어있는 입. 나중에 미술사가들은 이를 두고 큐비즘이라고 이름붙였지만, 어쨌든 '아비뇽의 처녀들' 을 통해 일반인들은 어렴풋하게나마 현대미술이 기존의 상식이나 질서를 허물어뜨리는데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됐다.

사실 피카소 이후 현대미술이 걸어온 길은 '미술에 속하지 않았던 것' 을, 말하자면 미술의 상식 밖에 있던 것을 미술안으로 끌어들이는 과정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새롭고 신기한 것들이 마치 블랙홀에 빨려들어가듯 속속 현대미술에 포함됐다.

거기에는 생활 쓰레기도 있었다.

현대미술에 생활 쓰레기를 집어넣은 작가가 영국 태생의 토니 크랙 (48) 이다.

런던 로열칼리지 출신으로서 80년대 이후 영국조각의 새로운 스타의 한사람인 그의 작품이 국립현대미술관을 통해 국내에 처음 소개되고 있다 (9월3일까지) . 20년전 어느날 그는 템즈강변을 물끄러미 보다가 떠내려오는 플라스틱 조각들을 무심히 건져 올렸다.

그리고서는 며칠을 고민한 뒤 색깔대로 순서를 맞춰 바닥에 늘어놓았다.

플라스틱 장난감조각.바께쓰 뚜껑.머리빗.샴푸통등 5백여개의 플라스틱 조각으로 만들어진 작품이 '스펙트럼' 이다.

비슷한 시기에 그는 또 공사장에서 나온 폐자재를 닥치는대로 모았다.

흠집이 나있는 나무토막에서 합판.석면조각 그리고 스티로폼까지. 이것을 가로.세로 2에 높이 2로 차곡차곡 쌓아 '더미' 라고 이름 붙였다.

이런 생활쓰레기를 작품으로 바꾸는 이유는 무엇인가.

토니 크랙 자신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형식적이고 예술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학생시절은 가난했습니다.

버려진 재료에 자연스럽게 관심이 쏠렸는데 저는 그것들을 한번도 쓰레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누구도 사용하길 원치 않아서 버려진 것 뿐이지요. " 처음은 이랬지만 그후 그는 "조각은 재료의 진보를 말하는 것" 이라는 설명을 하기 시작했고 "이런 재료는 우리 자신에 관해서 무언가를 드러낸다.

또한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과 깊은 관계가 있다" 는 설명을 덧붙여갔다.

그의 작업은 말하자면 재료를 통한 세상보여주기다.

재료는 쓰레기에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병.주사위.금속조각.고무까지 다양하고 기발해졌다.

그리고 그가 '쓰레기가 용도를 찾지못해 잠시 내버려둔 것' 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가 보여주려는 세상은 상식의 세계에서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 상식 밖의 자유로운 조형세계다.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자유로움을 가장 큰 덕목으로 삼는 현대미술의 세계에서 그의 이름이 유명한 것도 이런 때문일 것이다.

윤철규 미술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