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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이 남긴 숙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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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17일 밤 11시30분 명동성당을 찾았다. 얼어붙은 심야에도 참배 행렬이 이어졌다. 이런 추모 열기는 처음이다. 김수환 추기경이 보여준 삶에 대한 존경심이다. “다시 살아보라고 해도 더 잘할 자신이 없다”던, 최선을 다한 삶이다.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던 동력은 물론 종교적 신념이다.

김수환 추기경의 종교적 신념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으로 대표된다. 김 추기경은 “내 머릿속을 한시도 떠나지 않은 생각은 어떻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대로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점”이라고 말할 정도로 절대적 영향을 받았다.

공의회는 로마교황이 소집하는 전 세계 주교 총회다. 2000년간 21번 열렸으니 말 그대로 세기적 사건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1962년부터 65년까지 열렸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100년 사이 두 번의 세계대전이 있었고, 식민지가 사라졌으며, 공산 국가가 탄생했다.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킨 교회의 부패와 분열상도 방치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공의회를 소집한 교황 요한 23세는 ‘쇄신과 일치’를 부르짖었다. 쇄신은 변화와 개혁이며, 일치는 대화와 화해다. 종교적으로는 다른 종교(특히 개신교와 동방정교)와의 화해, 세속적으로는 사회 참여가 핵심이다. 이후 개신교는 ‘사악한 이단’에서 ‘헤어진 형제’가 되었으며, 미사는 라틴어가 아니라 각자 자기 나라 말로 올리게 됐다.

공의회가 열릴 당시 젊은 신부 스테파노는 독일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당시 유럽에선 가톨릭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으며, 특히 사회학은 현실참여를 강조했다. 스테파노는 닫혔던 교회의 문을 활짝 여는 대변혁에 감동했다. 유학 시절 그의 라디오는 바티칸방송에 고정됐으며, 귀국 후 가톨릭시보사 사장 시절엔 통신사로부터 바티칸 소식을 따로 얻어 직접 번역해 글을 실었다.

김 추기경의 공의회 정신은 70, 80년대 한국 사회에서 독재권력에 대한 저항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었다. ‘세상으로 나아가 하느님의 백성으로 거듭 태어나자’면 하느님의 소중한 피조물인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일에 헌신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가 유신독재에 대한 항거, 87년 민주화 운동 당시 명동성당 시위대를 보호하기 위해 “나를 먼저 밟고 가라”고 외치던 용기다. 민주화 이후 시대 변화로 추기경의 모습도 달라졌지만 그의 하느님 사랑, 인간 사랑은 선종의 그날까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많은 사람들은 추기경을 오해하고 비난해 왔다. 독재권력 시절엔 보수세력이 헐뜯었다. 가톨릭 내 민주화 세력인 정의구현사제단을 배후 조종한다며 붉은색을 뒤집어씌우려 했다. 실제로 탄원서를 교황청에 보내기도 했다. 반대로 민주화 이후엔 진보세력이 추기경을 비난했다. 추기경이 명동성당 농성을 비판하고, 국가보안법 폐지를 반대하는 등 보수적 행보를 보이자 일부 진보세력에서 “시대에 뒤떨어진…” “늙으니까…”등 옮겨 적기 민망한 독설을 내뱉었다.

그러나 추기경은 진보니 좌경이니 생각해본 적이 없으며 정치적 의도나 목적을 두고 한 일은 더더욱 없다. 민주화 이후 정의구현사제단의 활동에 거리를 둔 것은 ‘사목자가 본분인 사목 현장은 비워두고 다른 일에 몰두하는 것을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명동성당 점거농성을 꾸짖은 것은 ‘언제부턴가 힘있는 이익집단들이 장기간 상주하면서 성역을 훼손했기 때문’이다. 추기경은 정치인도, 이데올로그도, 사회운동가도 아닌, 철저한 성직자였을 뿐이다. 정치와 이데올로기의 눈으로 보면 오해하게 마련이다.

추모 열기가 추기경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씻어주는 듯해 다행이다. 이제 남은 것은 추기경의 정신을 잊지 않는 것이다. 교회부터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추기경이 그토록 경계했던, 그리고 바티칸 공의회가 타파하려 했던 분열과 갈등, 그리고 타락은 없는지. “사랑하세요”란 추기경의 고별사는 남은 자들 모두에게 던진 영원한 숙제다.

오병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