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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사진가 ①

중앙일보

입력

평범한 거리 풍경에 매료돼 20년째 카메라에 담고 있는 유재학씨. 그가 요즘 주목받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 그는 길 곳곳에 숨어있는 식물에 빠졌다. 저명한 사진가 배병우 선생은 유재학씨의 작품에 대해 “풍경을 바라보는 시선 속에 진정성이 담겨 있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는 “길 위의 식물에서 무언가를 배우고 있다”고 말한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과연 식물의 어떤 모습이 그를 20년 동안이나 거리를 배회하게 만드는 것일까. 직접 들어봤다.

길 가의 꽃


Q 거리의 식물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A 거창한 이유는 없습니다. 그냥 걸으면 마음이 편하고 그렇게 걷다가 식물들을 만나면 행복해져요. 사진가로 살아가면서 무언가 교감하는 능력을 키우고 싶은데 사람에게 다가서기란 너무 힘든 일이잖아요. 동물도 있지만 그래도 식물만큼 편하진 않으니까요(웃음). 항상 그 자리에서 피고 지고 울고 웃는 식물이 저는 가장 편하고 좋아요. 가만 보면 식물들의 생애도 사람과 비슷한 것 같아요. 거리를 걷다 보면 어쩐지 말을 걸어오는 것 같은 꽃이나 나무들이 있어요. 그 느낌을 놓치고 싶지 않았죠. 식물과 마음껏 대화를 나누는 경지는 아니지만 그들도 우리처럼 생각하고 냄새를 맡고 여러 표정을 짓는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식물 얘기는 우리 조상들에게는 일상이었습니다. 현대인들은 믿지 않지만 그땐 정말로 그랬을 것 같아요. 바다 속의 산호를 보세요. 엄연히 식물이었던 것이 화석이 되어 오히려 여러 미생물들을 품어줍니다. 모든 생명체가 먼지에서 시작해서 먼지로 끝나는 건데 인간만 유별나요. 우리가 대자연 속 수평관계의 하나의 ‘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자꾸 까먹는 것 같아요. 이 엄청난 자연을 단지 핵폭탄 몇 개로도 한 순간에 멸망시킬 수 있다니 정말 위험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저는 거리를 배회하며 자연에 더 가까이 밀착해보고 싶은 겁니다. 식물과의 소통에 성공하면 더 잔잔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요.

길 속의 숲


Q 주로 어떤 장소를 걸어 다니며 작업하는지요?
A 편하게 걸어 다닐 수 있는 장소라면 어디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저는 한적하게 걷는 것이 좋아요. 그래서 차로 이동할 때도 집 주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편이에요. 힘들여 움직이는 걸 좋아하지 않고요. 굳이 모험이나 여행을 하지 않아도 찍을 소재들은 무궁무진합니다. 오히려 과욕을 부릴 때 작품이 잘 안 나오죠. 몸이 피곤하면 작업이 제대로 될 리가 없잖아요. 지금 원주에서 살고 있으니 원주 시내에서 식물이 아름다운 거리를 몇 곳 선정하여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제 출사 장소는 대부분 원주 아니면 필리핀입니다. 아내의 친정이 필리핀이거든요. 찍을 것은 어디에서든 항상 널려 있으니 굳이 사방으로 돌아다닐 이유가 없어요. 다만 내가 못 볼 뿐이죠. 장비나 장소 탓을 하는 것은 솔직하지 못한 자세라고 생각해요. 집 주변 거리를 돌아다니며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식물을 찍으면 되는 거예요. 단 작품에 집중하려면 아이와 아내가 잘 지내야 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저는 가장으로서의 스케줄이 출사 스케줄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여깁니다. 예술을 한답시고 가정을 등한시 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아요. 자기 가족도 돌보지 못하는 사람이 무슨 예술을 하겠어요. 거리를 거닐며 사진이나 찍고 다닌다고 제 삶이 쉬워 보인다면 오산입니다. 누구나 그러하듯 나름대로 다 고충이 있지요(웃음).

발걸음을 멈추고


Q 사진보다 가장 노릇이 우선이라고 하니 믿기 힘든데요.
A 가정도 예술도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한꺼번에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순 없지요. 그러면 둘 중 하나는 희생해야 되는 거 아니냐고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저는 그런 말이 이해가 안 됩니다. 뭐든지 자신의 환경에 맞게 최선을 다 하면 되는 거 아닐까요. 문제는 실력입니다. 평소 열심히 노력하여 실력이 출중하다면 생활고 정도는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습니다. 사진은 다른 예술에 비해 활용도가 높은 편이니까 적극 활용하면 됩니다. 예술가는 반드시 힘들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야 해요. 그런 사람들 치고 정말로 예술에 목숨 거는 경우도 거의 못 봤습니다. 주변에 힘들어하는 후배들을 보면 한심할 때가 있습니다. 열정적으로 노력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 보니 실력도 별로죠. 사진의 경우 상업적인 공간에서 자신의 실력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죠. 제 경우 20년 전 결혼을 하면서 잠시 패션전문 사진가로 활동하며 돈을 모았습니다. 그러다가 돈이 좀 모아지면 한동안 작품 활동에 집중하고 또 돈이 떨어지면 가진 재주로 돈을 벌고 그렇죠. 누구나 힘들게 사는데 안정적이지 않다고 해서 엄살을 떨 필요는 없어요. 일단 카메라를 들고 거리로 나서게 되면 모든 시름은 다 접고 작품에 열중하고 또 집안에 들어왔을 때는 가족들에게 충실하면 됩니다.

Q 향후 작품 계획을 말씀해주세요.
A 앞으로도 거리를 배회할 것이고 식물들을 찾아다니며 열심히 촬영하겠죠. 식물 하나만 들여다봐도 그 세계가 무한대라 다른 소재에 흥미를 느낄 새도 없을 것 같습니다. 또 생활이 힘들어지면 돈도 열심히 벌어야 하겠죠(웃음). 제 사진을 알아봐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공모전에 당선되기도 하고 후원을 받기도 하지만 그런 식으로 생활이 해결되지는 않으니까요. 어쨌거나 저는 식물들과 교감하는 작업을 멈추지 않을 겁니다. 삶이 끝날 때까지 항상 카메라를 들고 길 위를 걸어야죠.

워크홀릭 담당기자 설은영 en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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