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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년 만에 다시 빛보는 비운의 조각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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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스승 시미즈 다카시(淸水多嘉示·1897∼1987)를 넘어섰다.” “독특한 개성이 잘 살아 있다.” “이 정도면 한국 뿐 아니라 일본의 근대 조각사에도 권진규를 위한 자리를 내줘야 한다.” 2007년 9월, 일본 도쿄의 명문 미술사학 무사시노(武藏野) 미술대학. 60년 전 이 대학에서 유학한 한국 조각가 권진규(1922∼73·사진)의 작품 슬라이드를 넘겨보며 교수들은 탄성을 질렀다.

 올해로 개교 80주년을 맞는 무사시노미대는 이곳 출신 예술가 중 대표적인 인물 한 사람을 정해 개인전을 열기로 하고, 유화과·조각과 등 학과별 대표 작가를 놓고 토론을 벌였다. 조각과는 “브루델에게 배운 시미즈 다카시 교수의 제자 중 가장 예술적으로 성공한 조각가”라는 이유로 권진규를 내세웠다. 권진규라는 이름이나, 51세의 나이에 서울 동선동 작업실서 목을 맨 비극적 개인사는 몰랐지만 작품을 접한 교수들의 감탄은 일치했다. 결국 유화과에서 내세운 일본 추상회화의 정점 야마구치 조우난(山口長男)을 제치고 권진규 회고전을 열기로 결정했다.

◆4년에 걸친 권진규의 재발견=이에 앞서 무사시노대학 조각과 측은 도쿄 국립근대미술관과 합의, 올해 10월부터 3개월간 이곳에서 전시를 열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권진규 전’은 개교기념으로 여는 여러 전시 중 유일한 개인전이자, 학교 밖 전시가 됐다.

1953이번에 조사된 권진규의 작품 중 가장 오래된 것이 돌로 깎은 말머리(1952)일 정도로 그는 말머리라는 소재에 심취했다. 67년 테라코타로 제작한 ‘마두’(34.4×57.4×18.8㎝)는 기존의 고려대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과 연관지을 수 있다.[무사시노 미술대학 제공]

도쿄 국립근대미술관 마츠모토 도호루(54) 부관장은 “우리 미술관 큐레이터들은 권진규에 대해 자세히는 몰랐지만 소장품 중 인상적인 조각 두 점이 있다는 것은 모두 인정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근대미술관 소장품 중 한국 작가의 것은 이우환·김수자·곽덕준 등 4∼5명의 30∼40점 정도. 이 중 조각품은 권진규의 두 점뿐이다.

마츠모토 부관장은 “그의 작품은 특별했다. 근대 미술 작품 대부분은 개인의 발견이라 할 정도로 작가 본인의 희로애락이 강하게 반영된다. 그러나 권진규의 작품은 이를 넘어서는 보편성에 호소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미 2005년부터 개교기념전 준비를 위해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권진규에 대해 조사해 온 이 대학 조각과 구로카와 히로다케(57) 교수는 “권진규의 작품에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을 만든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치열한 탐구 정신이 녹아 있다”고 같은 조각가로서 찬사를 보냈다.

55년 일본서 배나무를 깎아 만든 ‘여인입상’(59×13×14㎝). 처가의 장모를 모델로 하되 중국 7세기 석불을 참고한 이채로운 작품이다. [무사시노 미술대학 제공]

◆미공개작 60여점 발굴=전시 준비를 위해 구로카와 교수 등은 권진규의 일본인 전 부인 뿐 아니라 대학 시절 동급생과 조교, 일본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열었던 화랑 대표의 조카 등 생전에 관련 있었던 이들을 찾아다니며 유품과 유작을 조사했다. 이 대학 박형국(미술사학·44) 교수와 구로카와 교수, 마츠모토 부관장 세 사람이 한 팀이 돼 수시로 서울 인사동과 화랑가를 뒤졌다. 박교수는 “조금이라도 권진규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만난 인사가 수백 명, 이 중 의미있는 자료를 제공한 사람만 100여 명”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찾아낸 미공개작은 53년 졸업전 당시 이 대학 조교였던 센나 히데오씨가 지금껏 간직하고 있던 졸업작품인 ‘여인 입상’과 현존하는 권진규 작품 중 가장 오래된 것인 52년작 석조 ‘마두’를 비롯해 조각품만 일본서 14점, 국내선 10점이고 드로잉까지 합치면 60여점에 달한다.

권진규 회고전 소식이 알려지면서 당시 무사시노 미대 동문들은 전시를 위한 후원회를 구성했다. 이들은 영화·다큐 감독 출신 고이케 세지, 영화 ‘고지라’의 미술감독 다치가와 히데아키 등 일본 문화계의 원로 스타들이다.

권근영 기자

◆무사시노 미술대학=일본 국립 도쿄미술학원(현 도쿄예술대학)과 차별화되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사립 미술학교로 1929년 10월 개교했다. 개교 당시 이름은 도쿄제국미술학교. 35년 다마미술학교가 분리돼 나갔고, 62년 무사시노미술대학으로 이름을 바꿨다. 유학생이 많은 게 특징인데 이곳을 거쳐간 한국 미술가만 해도 이쾌대·이유태·장욱진·주경·전수천·박고석·김창억 등 140여명이다.



권진규는 …

테라코타·옻칠 응용한 흉상 유명
절제된 조각으로 이상세계 추구

 일본 국립근대미술관에서 열리는 ‘권진규 회고전’은 낭보인 동시에 안타까운 소식이다. ‘생전에 이렇게 인정받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떨칠 수 없어서다.

쉰 한 살 나이에 ‘인생은 공(空), 파멸’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다.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돼 36년 전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는 서울 동선동의 열댓평 작업실 벽에는 ‘범인(凡人)엔 침을, 바보엔 존경을, 천재엔 감사를’이라는 낙서가 적혀 있다. 몸을 겨우 눕힐만한 골방이 딸린 작업실에서 두문불출했던 작가는 가난했고, 외로웠다. 이상주의자였고, 완벽주의자였던 권진규에게 한국 미술계는 차가웠다. 경제개발이 최고의 가치였던 1960,70년대 조각계를 휩쓴 기념동상사업을 멀리했던 그는 소외됐다. “지금의 조각은 외국 작품의 모방을 하게 되어 사실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불쌍합니다”라고 토로한 그에게 대학은 교수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1953년 일본 최고의 재야 미전 ‘이과전’서 특선을 차지한 권진규의 ‘기사’를 조사하는 일본국립근대미술관 마쓰모토 도호루 부관장, 무사시노대학 구로카와 고우키 교수와 박형국 교수(왼쪽부터).


권진규는 일본에서 촉망받는 조각가였다. 무사시노미술대학 재학 중인 1952년 최고의 재야 단체 공모전인 ‘이과전(二科展)’에 입상했고, 이듬해 졸업하고서는 특선을 거머쥐었다. 59년 귀국 후에는 테라코타와 옻칠을 응용한 건칠 기법으로 두상 조각과 구도자처럼 목이 긴 흉상을 만들었다. 전국의 절을 돌며 불상을 연구하기도 했다. 당시 서구에서 유행하던 추상조각을 좇던 한국 조각계 전반과는 다른, 이채로운 행보였다. 그는 “한국에서 리얼리즘을 정립하고 싶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고도로 절제된 정적인 조각을 통해 영원을 향한 이상세계를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을 담아내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시대의 비극을 넘어서지 못한 채 자신의 작품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목을 매고 말았다. 그는 바보였고, 천재였다. 한·일 미술계는 늦었지만 이제 그에게 존경과 감사를 표한다.

권근영 기자



◆권진규의 생애

-1922년 함경남도 함흥 출생

-49년 일본 무사시노미술대학 조각과에 입학

- 53년 90점이라는 높은 점수를 받은 작품을 내고 졸업

- 59년 귀국, 서울 동선동에 작업실 마련

- 68년 일본 도쿄의 비중있는 화랑인 니혼바시에서 개인전 개최. 당시 요미우리 신문은 “구상조각이 빈약한 현대 일본 조각계에 하나의 자극이 될 것”이라고 호평

- 73년 사랑하던 제자 김정제에게 “인생은 공, 파멸”이라는 유서 부치고 작업실에서 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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