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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사관저, 114년 박제된 역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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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닫힌 역사를 열 때 - . "첫번째 벽돌을 뜯어내자 안쪽에서 한줄기 찬바람이 뿜어져 나왔다.

밖의 더운 공기와 안의 찬 공기가 만나면서 순간적으로 성에가 생겼다.

벽돌 틈으로 속을 들여다본 순간…" (고고학자 조유전 박사가 묘사한 지난 71년 어느 여름날의 무령왕릉 발굴 상황) . 저 아름다운 담장 너머엔 무엇이 있을까. 지난 1883년 5월, 당시 일본 공사였던 미국인 L H 푸트가 서울로 들어와 땅과 건물을 '영원히' 샀다고 했던가.

긴 역사를 놓고 보면 고작 1백14년간 닫혀 있었던 곳. 그나마 한국전쟁 때는 동네 아이들이 뛰놀던 놀이터. 개구쟁이들은 텅 빈 그곳을 '귀신 집' 이라 불렀다지. 취재에 동행한 목원대 김정동교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치외법권지역이라 항상 담장만 맴돌다가 돌아갔는데 오늘에야…. 기념촬영을 한답시고 학생들을 '모델' 로 세워 놓고는 정작 다른 것들을 향해 몰래 셔터를 누르던 기억이 새롭군요. " 문득 7월 장마비가 가늘어진다.

'블루 인 그린' .마일스 데이비스의 재즈 연주곡이 환청으로 퍼진다.

아주 느린 템포로 이어지는 색소폰과 피아노 소리 - .블루 (파란색) 의 의미란 게 뭔가.

슬픔.우울함. 다르게는 원초적 단순함과 무한한 공간이다.

타인이 아름답게 간직해 준 근대사의 현장을 앞에 두고 가슴은 파랗게 물든다.

그린 (녹색) 의 이미지는 '서울 최고의 녹지대 주거공간' 라는 별명에서 금세 느낄 만하다.

북쪽 끝에 자리한 리처드 크리슨텐슨 대리대사의 공관은 단아한 모습이다.

김교수가 말문을 연다.

"서양식을 가미한 일본 근대건축, 화양 (和洋) 절충식입니다.

1920년대 전후에 유행한 양식인데…기록에 나올지는 모르겠군요. " 크리스텐슨 대리대사가 말을 받는다.

" '다다미' 바닥만 고친 것뿐 그대롭니다.

지난번 집수리 때는 낡아 이빨이 맞지 않는 나무 창틀 대신 금속제품으로 갈자고 하더군요. 난 안된다고 버텼습니다.

조금 불편하면 어떻나요. " 건물의 외형을 빼고는 전형적인 일본식이다.

실내 장식. 페치카. 연못이 놓인 정원. 2차대전 당시 방공호. 일제 (日帝) 잔재 청산 바람에 대부분의 근대 건축물은 사라지고 있다.

조선총독부 건물까지도 같은 운명. 그래서 치욕의 역사도 역사라는 말은 이제 무의미하다.

과거 이 집엔 누가 살았을까. 크리스텐슨은 정말 그것이 궁금해 견딜 수 없다.

대문과 함께 떨어져 나가고 없는 문패. 움푹 팬 자국이라도 사라진 이름자를 기억해 주면 좋으련만. 하지만 참사관이 사는 공관의 대문 한쪽에 다 이겨진 문패가 있다.

첫 글자 '東' , 맨 끝 '番地' 는 읽을 수 있건만 나머지는 확인이 어렵다.

한 한국인 관리인이 말을 던진다.

"동양척식의 총재 관사였다는 말이 전해지긴 한데…. " 우리가 챙긴 단서는 단 하나 이것뿐. 그게 사실이라면…. 동양척식주식회사. 한반도를 수탈하던 일본의 거점. 1909년 2월초 현역 육군중장 우사카와 (宇佐川一正)가 실무자 80여명과 서울 첫 부임. 을지로 2가에 있던 본점 건물은 1911년 봄에 착공해 그해 가을 서둘러 완공. 그렇다면 이 건물도 거의 같은 시기에 지어진 우사카와의 집일지 모를 일이다.

대사관저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오래된 담장이 길을 가로막는다.

담장을 따라 길이 나 있다.

아관파천 (俄館播遷) 당시 고종 일행이 덕수궁과 러시아 공사관을 비밀리에 오가던 통로였다고 한다.

그리고 쪽문 하나. 지붕은 조선식, 기둥은 현대식인 작은 출입문을 쳐다보노라니 다시 마음이 어수선해 진다.

옛날 덕수궁 안을 오가던 문이었을 것이다.

김정동 교수의 설명 - "저기 기왓장의 태극문양과 복 (福) 자를 보십시요. 우리 것을 의미하지요. 아까 건물 기와에 새겨진 영 (永) 자는 일본을 상징하는 표시…. " 출입문을 통해 들어선 곳. 대사관저 뒤편이다.

다시 크리스텐슨의 궁금증이 발동한다.

"태조 이성계의 둘째 부인의 묘가 이 근처에 있었다고도 하는데…. 정말 그랬나요. " 영문 안내 팸플릿인 '하비브 하우스' 에도 비슷한 기록이 남아 있다.

"1948년 한국정부로부터 추가로 사들인 땅 중에는 한국인의 오랜 금기를 깨고 도성 안에 만들었던 13세기 태조의 왕비 묘터도 있다.

" 나무들의 굵기가 보통이 아니다.

장마비로 씻겨내린 땅에서 부서진 기왓장과 도자기 파편들이 모습을 내밀고 있다.

그리고 무덤이 위치했을 법한 구릉과 이장 (移葬) 이후 잔디조성을 한 듯한 평탄지. "무언가 있지 않을까?" 앞에서 바라본 한국식 건축물 '하비브 하우스' 는 제법 눈에 익다.

지난 94년 6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북한의 김일성 주석을 만나고 돌아와 내외신 기자회견을 했던 장소다.

본래 구한말 민계호 (閔啓鎬) 판서 사저였다지. 미국은 보수공사를 거듭하면서 대사관저로 사용하다가 지난 72년 기둥이 엇갈려 내려앉는 소리를 내는 바람에 서둘러…. 필립 하비브 대사는 다시 원형을 살린 전면 보수를 주장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판단에 그는 양보. 건축가 조자용 (趙子庸) 씨 설계로 지난 76년 우리의 전통 한옥식 관저가 들어섰다.

"이것 보세요. 문무석중 문인석상. 무덤 앞에 있던 거죠. 무인상은 어딜 가고 없네요. " 김정동 교수가 가볍게 흥분한다.

정원 귀퉁이 문인석상 한쌍이 제각각 떨어져 서 있었다.

아무도 기억하거나 찾아보려 하지 않았던 비극의 역사 파편. 그리고 지금은 게스트 하우스로 사용되는 덕수궁 전각 하나가 외롭게 서 있다.

다시 '블루 인 그린' 의 색소폰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모두 잠시 말을 잊는다.

김교수가 몇마디를 흘린다.

여전히 낮은 톤이다.

"이 치외법권 지역 바깥의 우리 것은 차츰 사라지고. 뭐라 해야 하나. 남이 지켜주고 있는 역사의 흔적…. 마음이 심란하군요. " 판단일랑 일단 유보하자. 아무튼 이 근처 어딘가에는 능이 있었을 터. 신장석은 실려가 광통교 돌다리 자재로 쓰이고 흉악한 몰골의 무인석상은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았을 것이다.

고이 남은 문인석상은 도대체 무엇을 지키고 있는 것일까. 오랜만에 광통교도 되짚고 태조 건원릉도 가보자. 오락가락하던 비가 갑자기 굵어진다.

정말 못믿을 몬순지대의 여름 날씨.

<허의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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