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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발견] 차이콥스키가 아파트 광고모델 된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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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러시아 작곡가 차이콥스키(1840~93)의 피아노 협주곡 1번 도입부는 코미디에서 ‘좌절’ 장면에 단골 배경음악으로 등장한다. 비장하게 하강하는 4개의 음을 호른이 연주하면 피아니스트는 격렬한 연속 화음으로 답한다. 1990년대 중반, 코미디언 이영자가 쓰러지는 장면에 쓰이면서 안방 시청자와 친숙해졌다.

최근 이 음악이 다시 대중과 만났다. “똑같지 않은 발상이 세기의 명곡을 탄생시켰다”라는 멘트가 흐르는 아파트 광고다. 배우 고소영을 모델로 썼던 이 CF는 비용 절감 차원에서인지 차이콥스키와 독일 작가 괴테를 내세워 내용을 바꿨다.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처럼 기존의 관습과 형식을 파괴하는 ‘명품’으로 남겠다는 뜻이다.

광고에서는 “당대의 연주자들이 모두 거부한 음악”이라고 했지만 사실 ‘뼈 아픈’ 비난은 차이콥스키의 스승이 남겼다. 모스크바 음악원의 초대 원장으로 차이콥스키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은 1874년 이 피아노 협주곡을 가리켜 “피아니스트가 연주할 수 없는 기괴한 음악. 멜로디는 촌스럽고 진부하다”고 혹평했다. 정교하기보다는 화려한 구조, 피아노를 부술듯 연주해야하는 테크닉과 귀에 쏙 들어오는 선명한 멜로디 때문이었다. 늘 자신 편이었던 루빈스타인을 위해 이 곡을 썼던 차이콥스키는 좌절했다. 이 작품은 결국 독일의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한스 폰 뷜로우가 미국에서 연주한 후 빛을 봤다. 지금은 러시아의 자랑인 차이콥스키 콩쿠르의 결선 지정곡으로 매년 나올 정도다.

생전의 차이콥스키는 모국에서 “러시아 전통을 무시하고 국제주의의 망상에 젖었다”는 비판을 들었다. 피아노 협주곡 1번으로 받은 혹평은 그가 생전에 감당했던 수많은 시련의 일부분일 뿐이다. 그가 작곡한 나머지 두개의 피아노 협주곡은 여전히 그늘 속에 있다.

스승의 비판 이후 대중의 사랑을 받은 1번과 달리 2·3번은 거의 연주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두 곡 역시 남다르다. 피아노 대신 오케스트라 바이올린 주자의 독주 부분을 길게 두고(2번 2악장), 바르토크·라벨 등 후대 작곡가를 연상케 하는 리듬을 쓰는(3번 1악장) 등 기존의 틀을 깨려 노력했다. 광고에서 말한 차이콥스키의 ‘똑같지 않은 발상’이 궁금하다면 또 다른 ‘불행한 명곡’인 2·3번을 들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김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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