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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속으로> 1.만화…발상 뒤집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4면

일본은 세계적인 만화.만화영화 (애니메이션).전자게임의 수출국이다.

한국의 청소년들도 일본이 내놓은 각종 오락상품에 심취해 있다.

반대편에는 일본만화에 대한 전면적인 개방 이후로 '저질이다' '문화적 침략이다' 라는 식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많다.

일본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속을 들여다 보자. 감춰진 비결을 알아야 대응책도 나올 테니까.

지난해말부터 올초까지 일본에서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상품이 세가지 있다.

'다마곳치' '파이널 판타지7' '에반겔리온' 이 바로 그것이다.

일본내에서만 이미 7백만개 (1천1백20억원 어치)가 팔린 것으로 추정되는 다마곳치에 대해선 더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

전자오락 게임인 파이널 판타지7은 판매량 3백10만장 (1천7백억원 어치) 이라는 진기록을 넘어 계속 행진중. 그러나 아직은 놀라지 마라. '아!에반겔리온' 이라는 감탄사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일본의 지난해 레이저 디스크 (LD) 판매랭킹 10위권에는 세계적인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인 '라이온킹' '포카혼타스' 조차 얼굴을 내밀지 못하고 있다.

일본이 낳은 천재 애니메이터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이웃집 토토로' 도 마찬가지다.

그런 판에 요즘 엔터테인먼트 전부문에서 온통 에반겔리온 '싹쓸이' 현상이 일고 있다.

에반겔리온은 만화 (4백6만부).LD/비디오 (2백76만개).극장판 영화 (1백20만명).전자오락CD (76만장).주제가CD (3백36만장).원화집 (3백60만부).캐릭터상품등 각부문에서 상품화에 성공했다.

총매출액은 2천4백억원. 최종작에 해당하는 극장판 영화가 공개되고 만화 단행본의 출판이 완결되는 내년말에 이르면 매출액은 4천억원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실적은 지난 4월말 기준, 관계기사 45면) . 에반겔리온의 히트 비결을 뜯어보기 위해서는 먼저 줄거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남극 대륙에서 의문의 대폭발이 발생해 인류의 절반이 사망한 이후 15년이 경과한 서기 2015년. 일본의 수도인 제3도쿄시에 시토 (使徒) 라고 불리는 거대 괴물로봇이 습격해 온다.

지구 방어를 맡은 초법규 특무기관 '넬프' 의 사령관 이카리 겐도는 10년만에 재회한 14살의 아들을 불러 거대 로봇인 에반겔리온의 파일럿이 될 것을 명령한다.

이후 인류의 운명을 건 에반겔리온과 시토와의 처절한 싸움이 시작된다.

이 정도라면 '마징가 Z' 보다 크게 나을 바가 없다.

그러나 묘하게도 그 스토리는 현재의 20~30대의 성인들이 자라온 환경과 철저하게 대응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적 시토는 입시경쟁의 상징물이다.

주인공 소년 이카리 신지 (분노한 마음이라는 뜻) 는 결과적으로는 지구를 구하는 영웅이지만 정작 본인은 단 한번도 그런 자부심을 가진 적이 없다.

주위 사람들의 기대를 배신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에반겔리온을 조종해서 싸우고 있을 뿐이다.

이는 대학입시를 위해 무작정 공부해 온 젊은이들의 학창시절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는 셈이다.

부친은 회사 일에 쫓겨 가정을 내팽개친 아버지와 흡사하다.

소년이 바라는 것은 아들에게 시토를 물리치라고 명령을 내리는 사회적인 아버지가 아니라 가정적이고 평범한 아버지, 그리고 그로부터의 칭찬과 격려다.

그러나 아버지는 26회의 스토리중에서 딱 한번 소년의 기대를 만족시킬 뿐이다.

당연한 일을 하는데 무슨 칭찬이 필요하냐는 식이다.

가정교사 역할을 상징하는 미사토는 에반겔리온을 조종하는 일을 싫어하는 소년에게 말한다.

"지구를 구한다는 자각을 가져라. " 소년은 신경질적으로 대답한다.

"알았어. 이기면 될 거 아냐. " 이는 마치 부모의 야단에 "알았어. 우등상 타면 될 거 아냐"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마지막 시토의 파일럿인 카오르는 죽음을 맞는다.

이카리는 유일하게 마음이 통했던 친구를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는 사실을 알고 결국 미쳐버린다.

입시경쟁을 통해 누구나 한번쯤은 겪었을 고뇌를 상징하는 대목이다.

이처럼 에반겔리온은 젊은 날의 좌절과 분노, 그리고 갈등과 방황을 로봇 만화의 형식을 통해 충실하게 재현했다.

95년 에반겔리온이 저녁 6시30분에 TV 만화영화로 처음 방영되었을 때에는 시청률이 6%를 넘지 않았고 결국 중도에 하차했다.

초등학생들에겐 너무 어렵고 재미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에반겔리온은 성인 팬들 사이에서 입으로 회자돼 공전의 금자탑을 쌓게된다.

다름 아니라 '성인용 전략' 이 적중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구매력을 갖춘 소비자 아닌가.

초등학생들 경우라면 용돈 1만원으로 무려 4천만명이 참여해야 가능할 시장이 1백만원을 쓰는 성인 40만명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것도 현대인의 급소인 '추억' 을 건드리는 방식으로…. 김지룡

필자 약력 : ▶64년 인천생 ▶서울대 경영학과 졸업 ▶일본 게이오 (慶應)대 박사과정중 ▶최근 '비상구 없는 일본의 에로스'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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