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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속 ‘죽음의 천사’ 멩겔레를 처벌하다-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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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인간 생체실험과 유대인 학살에 앞장섰던 멩겔레는 미국과 이스라엘 정보기관의 추적 1호였다.

과학자 멩겔레가 자진해서 정말 잔인의 극치에서 인간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에 앞장선 것인지, 아니면 오늘날 막스 플랑크 연구소의 전신으로 당시 세계 최고의 과학 요람인 빌헬름황제연구소의 명령에 따라 누군가가 해야만 할 역사의 악역(惡役)을 할 수 없이 떠맡게 됐는지 정확하게 알 길이 없다.

역사적인 경위가 어떻든 간에 멩겔레는 나치에 동조한 과학자로 유대인 학살에 앞장선 살인자였다. 유대인과 나치와의 전쟁이라는 2차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난다면 가장 먼저 체포해서 처단해야 할 목표 1호였다.

종전을 불과 몇 개월을 앞둔 1945 3월. 러시아의 붉은 군대가 동쪽으로부터 진격해오자 독일 패망을 확인한 그는 아우슈비츠를 탈출했다. 혼란한 틈을 타서 한동안 독일 내에서 가명을 쓰며 숨어 지내기도 했다.

이탈리아에서 아르헨티나로, 다시 파라과이에서 브라질로 도주해

점점 수사망이 좁혀오자 멩겔레는 남미로 도주했다. 아르헨티나를 거쳐 파라과이, 다시 1959년 브라질로 이주하였으며 수영 중 익사사고로 죽을 때까지도 수사기관을 조롱해 왔다. 남미로 탈출하는 데에는 당시 히틀러 편에 섰던 로마 교황청의 도움이 컸다는 지적이 많다.

노년에 접어든 죽음의 천사 멩겔레. 그는 정보기관의 수사망을 조롱하면서 당시 69세의 천수를 다했다.

당시 로마 카톨릭 국가인 아르헨티나는 거금을 받는 조건으로 나치 전범들의 망명처가 되기도 했다. 그러한 가교역할을 한 곳이 바로 로마 교황청이다. 로마 교황청은 유대인에 대한 인종청소를 포함한 히틀러 정책에 눈을 감아 주고 있었다. 오히려 동조하고 있었다.

<히틀러의 과학자들>의 작가 조지 콘웰 교수의 <히틀러의 교황>이 바로 당시 히틀러, 그리고 나치 정치인들을 비호했던 로마 교황청의 흑막(黑幕)을 낱낱이 파헤쳐 뉴욕타임즈(NYT) 베스트셀러에 오른 작품이다.

당시 교황은 비오 12세(Pius 12)로 1939년부터 1958년까지 260대 교황으로 재직했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강의하고 있는 곤웰 교수의 <히틀러의 교황>은 바로 나치에 동조했던 비오 12세의 비밀을 파헤친 작품이다.

히틀러와 비밀 컨넥션을 갖고 있던 로마교황청

<히틀러의 교황>은 히틀러에 동조했던 당시 로마 교황 비오 2세의 비밀 컨넥션을파헤친 작품이다.

전 세계가 유독 유대인을 싫어하는 데는 종교적인 편견 때문이다. 예수를 죽인 유대인은 가톨릭뿐만 아니라 모든 기독교의 적이고 악마였다. 이러한 유대인에 대한 증오는 러시아 가톨릭(러시아 정교)에서도 마찬 가지다. 유대인 학살은 나치 독일에서뿐만이 아니다. 러시아에서도 일어났다. 또한 스페인 등 유럽에서 일어난 마녀사냥의 대상은 항상 유대인들이었다.

중세시대 페스트가 유럽전역을 휩쓸어 유럽인구 3분의1의 목숨을 앗아갔다. 카톨릭 유럽은 유대인들을 마녀사냥으로 많이 죽였다. 몸이 까맣게 변해 죽는 이 흑사병을 사탄인 유대인들이 옮겼다는 것이다. 확인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페스트가 창궐하는 가운데서도 이상하게 유대인들은 별로 감염이 안됐다고 한다. 그래서 유대인들을 더욱 의심하고 학살했다.

1947년 간행된 장편 소설 <페스트>는 카뮈의 작가로써의 명성을 드높인 작품이다. 여기서 페스트는 분명히 프랑스를 전쟁으로 휩쓸어 넣은 나치 침략의 상징이다. 페스트의 종언은 파리의 해방을 의미한다. 세계의 부조리 반항하는 인간은 지성에 뿌리박은 연대의식 속에서 행복을 얻는다는 그의 철학이 스며있다.

독일이 원자폭탄 개발에서 미국에 진 것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경제력이다. 전시동원체제에서 엄청나게 많은 돈을 쏟아 붓고 있는 독일로써는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가는 원폭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하기가 역부족이었다.

“핵물리학은 저급한 유대인의 물리학”

약 4만5천명에 달하는 많은 과학자를 투입한 1942년 원폭개발 계획 맨하튼 프로젝트에 미국 정부는 당시 22억 달러의 예산을 책정했다. 독일은 유럽의 최대 경제 대국이었다. 그러나 군사비 지출이 엄청나게 많은 나치 독일이 원폭개발에 이 정도의 돈을 따로 책정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다른 한 가지는 유대인에 대한 히틀러의 뿌리 깊은 적개심이었다. 영국을 한방에 날려 유럽을 손아귀에 쥐려고 했던 히틀러도 원폭개발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원폭개발을 추진한다면, 그 프로젝트를 이끌 사람은 대부분 유대인 과학자들이었다. 가공할 위력의 강력한 무기지만 유대인들이 만드는 건 싫었다. 핵물리 과학은 히틀러에게는 ‘유대인 물리학’이었다.

우생학적으로 볼 때 가장 열등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독일을 생물학적으로(결혼 등) 위대한 독일 민족을 오염시키는 유대인들이 독일을 승리로 이끌 핵무기를 만든다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히틀러 나치의 명분은 ‘위대한 게르만 민족 건설’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주도하는 프로젝트는 결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2차대전이 끝난 후 도피생활을 한 멩겔레의 향방은 오리무중이었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의 죽음의 천사 멩겔레에게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는 무려 240만 달러의 현상금을 내걸었다. 그러나 그를 잡는데 실패했다.

미국과 이스라엘 정보기관, 살아 있는 멩겔레는 못 잡아

모사드는 미국의 CIA, 소련의 KGB와 함께 세계 최고의 비밀 정보기관으로 통한다. 정보수집능력에서 KGB를 능가한다는 이스라엘의 모사드가 엄청난 현상금을 걸고 ‘유대인 학살자’를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멩겔레의 민첩함에는 두 손을 들고야 말았다.

이스라엘 모사드는 1970년대 유대인의 ‘최종해결책(Final Solution)’을 선두 지휘한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을 끝내 추적해 명성을 날렸다. 그러나 멩겔레는 끝내 잡지 못했다. 최종해결책이란 유대인을 다 없애버린다는 히틀러의 유대인 말살정책을 의미한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1945년 1월7일 수용소를 떠나 고향인 군주부르크(Gunzburg)로 갔다. 그리고 부모에게 인사했다. 그리고는 당시 생후 8개월 된 아들 롤프(Rolf)를 처음으로 안았다.

숨어 지내던 그는 그 해 11월 6일 다시 아우슈비츠로 다시 갔다. 그리고는 퇴각하는 패잔병들 베르마크트(Wermacht, 동부전선에서 소련군대에 패한 포로들)와 함께 서쪽으로 향해 도주를 시작했다. 이 패잔병들은 소련의 관할이었기 때문에 미국과 영국의 통제와 감시가 느슨했다.

얼굴이 잘 생겨 우루과이 여성과 결혼도

그는 나치 친위대 SS유니폼을 포로에게 팔아 패잔병 복장으로 바꾸었다. 그는 한때 연합군에게 포로가 돼 잉골스타트(Ingolstadt)의 포로수용소에 감금되기도 했다. 명석한 멩겔레는 탈출에도 변장에도 귀재였다. 그는 다시 이탈리아 제노바로 도주했다.

전쟁의 포화가 점차 가시자 이차대전 전범에 대한 수사가 점차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는 1949년 아르헨티나로 다시 탈출했다. 전범수사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아르헨티나에서 그는 아버지의 방문을 받았고, 사랑하는 아들 롤프도 만날 수 있었다.

전범을 처벌하라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미국과 이스라엘의 정보망이 점점 좁혀오자 아르헨티나도 결코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그는 다시 파라과이로, 다시 우루과이로 도주해 거기에서 시민권을 얻었다. 잘 생긴 그는 우루과이에서 여성을 만나 결혼도 했다. 그는 다시 종적을 감추기 위해 유럽과는 교분이 거의 없는 광활한 밀림의 브라질의 한 마을에 정착했다.

이 마을에서 그는 친교를 맺고 있던 독일인 울프강 게르하르트(Wolfgang Gerhart)가 죽자 그의 이름으로 살았다. 그는 또 헝가리 출신의 노부부가 살던 좋은 집을 이어 받아 편안한 여생을 즐기고 있었다. 1979년 수영을 즐기는 도중 심장마비로 익사했다. 게르하르트의 이름으로 묻혔다. 이로 인해 ‘죽음의 천사’는 영원히 그 이름만큼이나 신비하게 사라질뻔했다.

DNA지문 기술이 없었다면 영원이 묻혔을 수도

미국 CIA, FBI, 이스라엘의 비밀정보기관 모사드 등이 가능한 안테나를 다 동원했지만 살아 있는 멩겔레를 잡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게르하르트라는 이름으로 오가는 편지들을 끈질기게 추적한 끝에 그의 소재를 알아냈다. 그러나 그때는 이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브라질, 독일(당시 서독), 그리고 미국의 과학수사팀이 게르하르트가 잔인한 유대인 학살자 ‘죽음의 천사’ 멩겔레라는 것을 밝힌 것은 죽은 지 이미 7년이 지난 1985년의 일이다.

피와 살은 흙이 돼 온데 간데 없고 덩그렇게 남은 해골과 뼈만이 남아 있는 무덤을 파헤쳤다. 그리고는 치아에서 얻은 DNA 지문을 통해 그가 바로 멩겔레라는 걸 확인했다. 아들 롤프의 DNA지문과 비교한 끝에 그가 아버지라는 것을 확인했다.

1911년에 태어난 그는 수사망을 피해가면서 1979년까지 살았다. 당시 사정으로 본다면 천수(天壽)를 다 누린 것이나 마찬 가지다. 이차대전이 끝나 30년이 지나 죽을 때까지도 정보기관의 눈을 피해가면서 유유하게 완벽한 생애를 마쳤다.

그는 죽어 없었지만 DNA기술을 이용한 정의의 법정은 그를 단죄했다. 아마 DNA기술이 없었다면 전범 현상금 1호 멩겔레는 하늘 어디에선가 지금껏 비웃고 있을지도 모른다. “CIA, 모사드, 흥, 열등한 너희들은 게르만의 우등생 나를 결코 찾아낼 수 없어, 이 멍청이들아!”

그러나 DNA는 그의 오만함을 짓이겨 뭉갰다. 비록 이미 죽은 멩겔레를 추적했지만 과학수사는 무덤까지도 파헤친다는 걸 보여준 현대 과학수사의 쾌거다. DNA 과학수사는 죽은 자에게도 분명히 죄 값을 물은 것이다.

그러나 멩겔레의 묘비명은 멩겔레가 아니다. 숨어서 지내면서 쓰던 가명 울프갱 게흐하르트 그대로다.

※ 다음 회부터는 이집트의 투탕카맨 왕에 얽힌 DNA 비밀을 소개하겠습니다.

김형근 칼럼니스트

▶ 무덤 속 ‘죽음의 천사’멩겔레를 처벌하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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