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다급해도 최소한의 원칙은 지켜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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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호 02면

요즘처럼 정부가 일하기 편한 때도 없는 것 같다. 당사자인 관료들은 ‘바빠 죽겠는데 무슨 소리냐’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정부가 일을 하겠다는 데 제동이 걸린 적이 거의 없다는 걸 생각해 보면 알 일이다. 재정을 대폭적으로 적자로 편성·운용하겠다고 해도, 새해가 시작된 지 한 달 남짓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추경예산 편성 얘기가 나오는 데도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오히려 더 많이, 더 빨리 하라는 의견이 태반이다. 기업 구조조정도 그렇다. 30~40년 전 ‘기업 옥석 가리기’는 정부가 주도했다. 이 때문에 정경유착 등 폐해가 많아 외환위기 직후 민간 주도형 구조조정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요즘엔 다시 과거로 되돌아가자고 한다. 정부가 앞장서서 부실을 도려내야 경제가 빨리 회복된다면서 말이다. 정부가 무슨 일을 해도 국민은 다 용인하는 분위기다.

김영욱의 경제세상

그만큼 경제가 심각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먼저 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비상경제상황실을 청와대 지하벙커에 설치하는 쇼를 벌여도, 새 경제팀이 예전 YS 정부가 추진했던 ‘100일 경기부양책’을 다시 꺼내드는 구식 행태를 보여도 그저 고마울 뿐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요즘 정부가 내놓은 정책들을 보면 좀 심하다는 느낌이 든다. 영리한 토끼는 세 개의 굴을 만든다는 교토삼굴(狡兎三窟) 고사에 나오는 토끼의 지혜를 바라는 건 아니다. 다만 정책을 내놓기 전 조금이라도 생각하고 조율했으면 싶어서다.

공정거래위원회를 보면 특히 그렇다. 공정위는 올해 불황 카르텔을 적극 운용하겠다고 한다. 지난 연말 대통령에게 보고한 2009년 업무계획에서도 그렇게 밝혔다. 경제가 어려우니 기업 간 담합을 용인하겠다는 의미다. 하도 어이가 없어 물어봤더니 사실이란다. 우리나라가 수출로 먹고살지 않는 나라라면 뭐가 그리 대수이겠는가. 그러나 수출 의존도가 아주 높은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없다. 두 달여 전 LG필립스LCD가 담합을 했다는 이유로 무려 4억 달러의 과징금을 두들겨 맞았다. 3년 전에는 삼성전자와 하이닉스가 반도체 담합 때문에 수억 달러의 과징금을 맞고 임직원들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런 사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공정위가 카르텔을 적극 운용하겠다니,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기업들이 담합해 외국에서 거액의 과징금을 맞는다면 그 뒷감당을 정부가 해 줄 참인가.

공정위도 나름대로 사정은 있을 것이다. 모든 부처가 경제 살리기에 동참하라며 위에서 닦달해 대니 어쩔 수 없었을 게다. 그래도 안 될 일을 하면 안 된다. 불황 카르텔이 그렇다. 공정위는 한때 카르텔에 대한 법집행 강화를 최우선적으로 하겠다고 공언했다. 이를 위해 강제조사권을 허용해 달라고 요청하던 과거를 생각해서라도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공정위는 얼마 전 개인과 기업의 신용정보 사업을 사실상 양분하고 있는 두 기업이 합치는 걸 승인하면서 글로벌 경쟁력 제고를 이유로 갖다 붙였다.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취지야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신용정보는 해외로 진출할 수 있는 비즈니스가 아니기에 글로벌 경쟁력 운운할 이유가 없다. 심지어 경쟁 저해 염려가 없다며 두 회사의 결합을 승인하던 바로 그 시각, 공정위의 다른 부서는 두 기업이 담합해 경쟁을 저해한 혐의를 잡고 조사하던 중이었다. 한쪽에선 문제 있다고 하고 다른 쪽에서는 문제가 없다는 조직을 누가 신뢰할 수 있을까.

경제는 살려야 한다. 그렇지만 최소한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 경쟁 촉진이라는 본연의 기능과 존재 의의까지 무너뜨리며 할 일이 아니다. 그래도 하겠다면 차라리 위원회를 없애는 게 맞다. 경쟁을 해치는 공정위가 살아 있을 이유란 없다. 위원장도 자리를 내놓아야 할 게다. MB 캠프에서 자문교수단을 이끌었다는 공로만으로 차지하기엔 너무 중요한 자리라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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