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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美封南 괴담에 휘둘리는 한국 사회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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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호 34면

한동안 잠잠한가 싶더니 북한은 미국의 버락 오바마 행정부 출범에 즈음해 강경한 대외 입장을 잇따라 표명하고 있다.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관해 성마른 어조로 알쏭달쏭한 입장을 발표하는가 하면 남북관계에 관해서는 초강성 수사(修辭)로 일관하고 있다. 신문지상에선 다시 북한의 ‘통미봉남(通美封南)’에 대한 걱정 어린 지적이 눈에 띈다.

‘통미봉남’이란 단어는 우리 학계가 만들고 언론이 유행시켰다. 그것이 마치 북한이 치밀하게 계산한 전략의 본래 명칭인 것처럼 회자되는 현상은 흥미롭기 짝이 없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좌파와 우파 모두 이 표현을 애용한다는 점이다. 북한의 통미봉남에 대한 정부의 대책을 따져 묻는 대목에서 우리 국회는 여야가 따로 없다. 모순된 생각을 하나의 표현으로 묶어 준다는 점이 바로 이 개념이 지닌 왕성한 번식력의 핵심이다. 이 표현은 직관적 감성에는 잘 와 닿지만 진실을 설명하는 힘은 없다.

좌파는 북한의 ‘봉남(封南)’을 싫어한다. 좌파가 비판하는 참뜻은 “정부가 북한을 살갑게 대하지 않음으로써 남한과는 상대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갖도록 북한을 내몰았다”는 의미다. 이런 주장이 그른 이유는 ‘봉남’이라는 행위 주체가 북한이란 엄연한 사실을 뒤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흡사 매 맞는 이유를 스스로에게 찾는 ‘매 맞는 아내들’의 특이한 증후군만큼이나 건강하지 못하다. 봉남의 이유는 봉남을 하는 측에 물어봐야 한다. 게다가 북한의 봉남은 남한을 ‘왕따’의 경지로 몰고 갈 힘을 갖고 있지도 못하다.

우파는 북한의 ‘통미(通美)’를 싫어한다. 1994년 제1차 북핵 위기를 풀기 위해 미·북 간 직접 접촉이 시작됐을 때 거의 모든 주류 언론은 강한 불안감을 표출했다. 한승주 당시 외무부 장관은 그 상황을 “남편이 시앗을 들인 데 대한 본부인의 질시”라고 비유했다. 이 비유는 정치적으로 적절치 않지만 문학적으로 정확했다. 질시의 근원이 투기심이 아니라 두려움이라는 점에서….

이런 우려도 그르다. 좌파가 동맹의 상대인 미국의 이익에 우리가 부당하게 연루(entrap)될 가능성을 과장하듯, 우파는 동맹인 미국으로부터 방기(abandon)당할 위험을 지나치게 우려한다. 동맹 관계는 미국이 단지 북한과 직접 접촉한다고 약해지는 게 아니다. 동맹은 일방이 동맹으로서 공유하는 가치와 동반자적 신의를 저버릴 때 약화된다. 동맹관계와 국제금융 사이에 닮은 점이 있다면 그건 ‘신뢰’라는 무형의 자산을 바탕으로만 지속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그른 표현이 널리 퍼져 괴담으로 번식했을까? 첫째, 통미봉남은 외톨이가 될지 모른다는 본능적 불안감을 자극한다. 유난히 집단주의 경향이 크고 자기연민의 역사관이 강한 우리 사회에서 따돌림당할 수 있다는 걱정은 증식력이 강하다.

둘째, 성공적인 다른 모든 괴담처럼 통미봉남도 진실의 일부를 재료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외문제 전략가인 헨리 키신저 박사는 저서에서 “평양으로 하여금 워싱턴으로 가는 길은 서울을 거쳐야만 하고, 그 역(逆)은 불가함을 확신토록 만들어야지 그 순서가 뒤바뀌면 남한은 주변화(周邊化)될 것”이라고 썼다. 이것은 미국 측 정책결정자들이 귀담아들어야 할 대논객의 ‘우정 어린 설복’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대북정책의 방법론과 효율성에 관한 말일 뿐 미국의 ‘통북봉남’ 관계 수립 가능성을 우려한 예언은 아니다.

상대를 괴롭히는 것이 애정 표현이라고 믿는 스토커처럼 북한은 줄곧 대미관계 개선을 소망해 왔다. ‘승냥이’ ‘원쑤’라고 줄기차게 부르면서도 북한은 미국이 한·미동맹 관계를 끊고, 주한미군을 철수하고, 분단을 영구적인 것으로 선언해 버리는 상황을 상상하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상상은 초(超)현실주의적이다.

지난달 20일 취임한 오바마 대통령은 대선 유세 시절 북한과의 직접 대화 의사를 표명했다. 그것은 북한더러 핵을 포기하라고 직접 말하겠다는 뜻이지 북한과 동맹을 맺자는 게 아니다. 미국과 북한 간의 직접 대화로 비핵화가 진전된다면 그건 우리에게도 다행이다. 문제는 과연 북한이 거기에 올바른 전략적 결단으로 호응할 것이냐 하는 점이다. 뭔가를 걱정할 여력이 있다면 괴담 같은 통미봉남이란 단어에 홀려 혹시라도 대한민국이 소외될까 걱정할 일이 아니다. 행여 북한이 다음 번에 그르칠 일이 94년 제1차 북핵 위기 고조 당시만큼 전 세계와 미국을 실망시키지나 말기를 걱정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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