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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국가기록 '허술' 각계인사 100여명 '재단설립준비위' 발족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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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조선시대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선조들의 기록의식에 놀라곤 한다.

'조선왕조실록' 을 비롯, '비변사등록 (備邊司謄錄)' '승정원일기 (承政院日記)' 등 역사기술의 기초자료가 되는 국가의 공식기록은 물론 행사마다 작성된 각종 의궤 (儀軌) 까지 기록의 정확성과 더불어 사건의 날짜, 행사의 의복 하나하나를 빠뜨리지 않은 세밀함은 수백년이 지나 컴퓨터라는 명기 (名器) 를 지닌 오늘날에도 탄성을 연발하게 한다.

또 한번 놀라는 것은 기록을 보관하는 의식. 규장각.장서각등 국가의 기록보존소는 물론 민가 (民家)에서도 개인의 일기와 함께 교지 (敎旨).분재기 (分財記).노비명문 (奴婢明文) 등 각종 문서를 대대로 소중히 보관하는 전통이 있었다.

오늘날에도 기록은 있다.

정부기록보존소.국사편찬위원회.한국정신문화연구원.외교안보연구원 등 보관소도 있다.

그러나 그 실태를 살펴보면 심각한 역사적 퇴보를 실감할 수 있다.

지난해 한.일 관계를 연구하는 한 학자는 65년 한일협정 체결 당시의 회의록 일부가 헌책방에서 고가로 매매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난해 안두희 피살사건 때도 49년의 재판기록은 물론 안두희에 대한 검찰의 수사기록조차 남아있지 않은 어처구니 없는 사실이 드러났다.

학자들은 기록보존의 전통이 사라진 원인을 일제 침략에 두고 있다.

조선총독부가 설치되면서 국가의 기록보존 전통이 단절됐고 민간에서도 기록을 남기는 행위 자체가 일제의 탄압을 자초한다는 인식이 확산됐다는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자신의 부정적 측면을 은폐하기 위해 중요 정책문헌을 소각하기 일쑤였고 이러한 관행이 해방 이후 정부 행정체계에서도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는 분석이다.

이제 기록보존의 중요성이 크게 확산되고 있다.

기록은 곧 정보이고 정보, 곧 기록을 가볍게 여기는 민족은 경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 5일 역사학.정치학.사회학.경제학 등 학계를 비롯한 각계 인사 1백여명이 '한국국가기록연구재단 설립준비위원회' 발족식을 가진 것도 이런 시대적 요청의 일환. 사회발전을 매개하는 기록의 생산.보존.활용이 몇 사람의 부정과 비리를 은폐하기 위한 무분별한 폐기 행위에 묻혀 정부와 국민의 관심밖으로 밀려나게 된 현실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병익 (高炳翊) 문화재위원회위원장.이원순 (李元淳) 국사편찬위원장.김준엽 (金俊燁) 대우재단 사회과학원이사장.한완상 (韓完相) 한국방송통신대총장.이기백 (李基白) 한림대교수등 학계 원로가 고문을 맡고 위원장 김학준 (金學俊) 인천대총장을 비롯해 유영구 (兪榮九) 명지대 이사장.권영빈 (權寧彬) 중앙일보 논설위원.민두기 (閔斗基) 서울대교수등이 참가했다.

재단은 앞으로▶기록보존 관련 연구사업▶기록수집 및 보존연구 지원▶기록보존 관련 학술대회 개최▶정부기록 영인출판 및 관련 연구서 발간 등 다양한 사업을 펼칠 계획이지만 무엇보다 한심한 수준으로 전락한 정부기록 보존의 현실을 체계적으로 개선하는 연구에 중점을 둘 방침. 정부기록보존소는 현재 1백24명의 직원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사서직과 연구직은 35명에 불과하다.

52억원의 예산도 대부분 인건비로 충당되고 자료수집비는 고작 5천여만원. 그나마 자료수집비 항목이 생긴 것도 올해가 처음이다.

유영구 명지대 이사장은 "국가기록은 당연히 국가에서 체계적으로 수집.보관.활용을 책임져야 하지만 방치되고 있어 민간이라도 나서야 한다고 생각돼 재단 설립을 추진하게 됐다" 고 밝혔다.

<곽보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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