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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 대 丁, 야권 주도권 경쟁이 핵심 고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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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호 11면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과의 국제전화가 5일 오후 연결됐다. “지금은 운전 중이고, 휴대전화 배터리 충전도 부족해 긴 통화는 어렵다”는 얘기였다. 미국 남서부 지역 교민을 대상으로 한 강연 때문에 피닉스를 거쳐 텍사스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며칠 내로 연수지인 듀크대가 있는 노스캐롤라이나주로 돌아갈 계획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출마 여부를 묻자 그는 즉답을 피한 채 “집(노스캐롤라이나)으로 돌아간 뒤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다. 짧은 통화였지만 그의 재·보선 출마 결심은 이미 선 듯 보였다. 그러면서도 그의 복귀에 지나치게 관심이 쏠리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한때 노무현 정부의 ‘황태자’란 얘기까지 들으며 승승장구했지만 대선 참패와 뒤이은 총선 패배로 쓸쓸히 미국으로 떠났던 정 전 장관. 그의 복귀를 놓고 지금 민주당이 안팎으로 시끄럽다.

정동영 출마설에 시끌시끌 민주당

당내 “이달 말 출마 선언” 파다
정 전 장관이 4·29 재·보선에 출마하려는 곳은 그의 옛 지역구인 전주 덕진이다. 민주당 김세웅 전 의원이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하면서 보궐선거가 치러지게 됐다.

지난해 4월 총선에서 서울 동작을 출마를 전격 선언했다가 한나라당이 정몽준 의원을 투입하면서 ‘불의의 일격’을 당한 그는 지난해 7월부터 미국에 머물고 있다. 당초 계획대로라면 올 1월께 중국으로 건너가 칭화대(淸華大)에서 6개월가량 더 연수를 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중국 연수는 가지 않기로 했다. 대신 그동안 뜸했던 국내 정치인들과 자주 통화하며 거취 문제를 상의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그와 가까운 민주당 의원들은 최근 그의 출마를 공개적으로 주장하며 군불을 때고 있다. 아직 공식 언급은 없었지만 그가 국회 상황을 봐서 2월 말께 출마를 선언할 것이라는 설이 당내에 파다하다.

그의 복귀에 대한 당내 찬반 여론은 엇비슷한 상태다. 한 언론사가 5일 민주당 의원 82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응답한 47명 중 그의 복귀를 찬성하는 의원(25명)이 반대하는 의원(22명)보다 약간 많았다. 하지만 찬성한 사람 중 9명은 정 전 장관이 전주 덕진이 아닌 수도권에 출마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수도권에 당당히 나와 의석 수를 보탠다면 환영하지만 쉬운 길을 찾는다면 반대하는 여론이 훨씬 많을 것”(박병석 정책위의장)이란 견해가 당내 다수 의견인 셈이다.

당내에서는 정 전 장관이 인천 부평을에 출마해 이 지역 출마 가능성이 있는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와 맞붙어야 한다는 얘기가 설득력 있게 돌고 있다. 심지어 서울 은평을 재·보선이 열릴 경우 이 지역 출마가 유력한 한나라당 이재오 전 최고위원과 일합을 겨뤄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최근 정몽준 의원이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된 점도 그의 재·보선 출마 반대론의 근거다.

반면 측근들은 전주 덕진이 그에게 15, 16대 두 차례에 걸쳐 전국 최다 득표를 안겨준 정치적 고향인 만큼 본인의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정 전 장관과 가까운 최규식 의원은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과 박근혜 의원, 이회창 총재 모두 자기의 고향에 지역구를 가졌다”며 “거물 정치인이라고 자기 고향에 출마해선 안 된다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지난해 총선 때 차출 형식으로 동작을 출마를 감행해 당을 위해 희생한 만큼 이번엔 개인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신주류 vs 구주류 역학관계 반영
정 전 장관의 전주 덕진 출마를 둘러싼 다양한 주장은 당내의 복잡한 역학관계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무엇보다 정세균 당 대표를 지지하는 주요 당직자와 386 그룹 등 신주류 세력 상당수가 정 전 장관 공천에 부정적이다. 정 전 장관의 복귀가 정 대표의 당내 입지를 약화시킬 것이란 우려 때문이다.

정 대표의 최측근인 최재성 의원은 “대선에서 굉장히 많은 표 차이로 진 상황에서 4월 재·보선에 또 출마하는 것은 당원이나 국민을 설득하는 데 무리한 감이 있다”고 반대했다. 공천 자체를 배제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호남 출마는 불가하다는 게 주류 측 대다수 의원의 생각이다.

이에 대해 정 전 장관 측은 “호남 공천 배제 주장은 결국 출마 자체를 막으려는 의도”라며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정 전 장관의 측근인 김상일 부대변인은 “정 전 장관이 수도권에 출마하려면 현재 지역위원장을 맡고 있는 동작을 지역구를 버리고 가야 하는데 그럴 만한 명분을 찾기가 쉽지 않다”며 “결국 그의 복귀를 원치 않는다는 의미가 숨어 있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당선 안전성 면에서나 정치적 고향으로의 복귀라는 명분을 모두 충족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카드가 바로 덕진 출마라는 것이 정 전 장관 측의 판단이다.

정 전 장관 복귀 찬성파 중엔 공교롭게도 반(反)정세균 대표 성격의 모임인 민주연대 소속 의원이 많다. 현역 의원 17명과 전직 의원 35명이 참여해 지난 연말 결성한 당내 비주류 연합 성격인 이 모임은 최규성(김근태계)·최규식(정동영계)·이종걸(천정배계) 의원이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정 전 장관도 김근태 전 의원, 천정배 의원과 함께 지도위원으로 이름을 걸어놓고 있다.

하지만 올 초 제1차 입법전쟁의 승리로 정 대표 체제가 힘을 받으면서 민주연대 등 당내 개혁진영의 목소리가 주춤하고 있는 점이 변수다. 2차 입법전쟁이 본격화돼 현 지도체제에 더욱 힘이 실리게 되면 이들의 입지는 상당 기간 좁아지게 되고 정 전 장관의 복귀 가능성도 그만큼 작아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민주연대 내부에서도 정 전 장관 복귀에 다양한 의견이 나오고 있다. 특히 김근태계 의원들은 공식 언급은 자제하고 있지만 정 전 장관의 복귀에 부정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한때 당내 최대 계파를 자랑했던 정동영계는 지난해 총선을 계기로 급격히 위축된 상태다. 대다수 의원이 공천에서 탈락하거나 낙선했고, 현재 정동계로 불릴 수 있는 현역 의원은 최규식·박영선·우윤근·주승용 의원 정도에 불과하다.

“극심한 인물난 상징적으로 보여줘”
정 전 장관의 복귀는 공천권을 갖고 있는 정 대표의 의중이 결정적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정 대표와 정 전 장관은 15대 때 전북 무주-진안-장수와 전주 덕진에서 함께 당선된 ‘원내 진입 동기’다. 둘 다 노무현 정부에서 장관을 지냈고 출신 지역이나 합리적 이미지 측면에서 많이 겹친다. 정 전 장관의 복귀 이후 경쟁 구도가 형성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이런 점을 의식해 정 전 장관 측은 최대한 몸을 낮추고 있다. 최규식 의원은 “당권 장악 운운하는 것은 전혀 터무니없는 얘기”라며 “정 전 장관은 백의종군한 뒤 원점에서 다시 시작할 각오를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공천권을 갖고 있는 정 대표 측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모습이 역력하다.

하지만 정작 정 대표가 정 전 장관의 전주 출마에 부정적이고, 오히려 인천 부평을 출마를 역제의할 것이란 얘기가 나오고 있다. 당초 2월 중순 출범시키려 했던 공심위를 3월 초로 연기한 것도 정 대표가 막판까지 당 안팎의 여론을 보고 결정하겠다는 의도로 해석된다.

정 전 장관의 복귀를 둘러싼 민주당의 내홍은 극심한 인물난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현재 민주당 내에서는 당의 무게중심을 잡아줄 만한 중량감 있는 중진이 전무한 상태다. 손학규·김근태·유시민·한명숙 전 의원과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 등 스타 정치인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정치권에서 멀어져 있다. 4년 뒤 대선에서 한나라당 후보와 맞설 만한 인물은 고사하고 내년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후보로 나설 만한 인기도를 가진 정치인도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불임 정당’이란 자조 섞인 목소리도 적잖이 들린다. 반전 카드도 마땅찮다.

익명을 요구한 한 민주당 재선 의원은 “두 차례 대선 도전 실패에 국회의원 선거까지 떨어진 사람의 복귀가 당을 한바탕 뒤흔들 정도로 민주당의 인적 기반은 극히 취약한 상태”라며 “당 지지율 회복과 외연 확대라는 선순환 구조를 하루빨리 만들어 내지 못하면 민주당이 수권정당이 될 길은 요원하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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