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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의 세계] <31> 항공기 조종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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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0면

국내 최초의 여성 조종사 신수진씨가 서울 강서구 대한항공 본사 B747-400 시뮬레이터의 조종석에 앉아 있다. [박종근 기자]

 “지상의 날씨가 아무리 나빠도 구름을 뚫고 올라가면 늘 청명한 하늘과 경이로운 풍경이 펼쳐지지요. 인생의 축소판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해 국내 최초로 여성 기장이 된 대한항공 신수진(40) 기장. 1997년부터 부기장으로 조종간을 잡아 왔지만 아직도 비행 때마다 가슴이 설렌다. 그는 비행기 조종석에서만 볼 수 있는 황홀한 풍경들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맑은 날 야간 비행 때 반짝이는 도시의 불빛, 캐나다 횡단 비행 중 만난 오로라, 구름 위로 비치는 비행기의 그림자, 그 주위에 둥그렇게 피어난 무지개 등등…. 그는 “땅 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게 조종석에 앉은 사람의 특권”이라면서도 “그만큼 책임감이 크고 고독한 직업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철저한 자기 관리=‘파일럿(pilot)’으로 불리는 항공기 조종사는 보통 항공회사에 소속돼 여객기와 화물수송기를 조종하는 사람이다. 주 업무는 물론 항공기 조종이다. 1월 15일 뉴욕 허드슨 강에 여객기가 안전하게 불시착한 사례에서 보듯, 조종사 능력에 수많은 사람의 생사가 걸려 있다. 조종사는 또 비행과 항공기에 관련된 모든 사항을 관리·감독해야 한다. 각종 계기의 작동·정비상태를 점검하고 운항 관계서류를 검토하는 일도 조종사의 몫이다. 비행 중 생기는 모든 상황을 판단하고 관제탑과 주요 정보를 주고받는 것 역시 중요한 일이다. 대부분의 여객기와 화물기는 두 명의 조종사가 조종한다. 이 중 선임인 기장(주조종사)이 비행에 관련된 모든 사항을 책임지고 부기장(부조종사)은 기장을 보조한다.

전문직으로 보수는 높은 편이다. 한국고용정보원에 따르면 항공기 조종사의 평균 연봉은 9239만원(2007년 기준). 이는 전체 조종사의 평균치로, 비행기를 책임지는 기장이 되면 초임이 1억원을 훌쩍 넘는다. 정기적인 체력·기술 검증을 통과하면 정년(55세 전후)이 지나도 촉탁으로 최대 65세까지 일할 수 있다. 세계 각국을 여행할 수 있다는 것도 매력이다. 비행 중에는 큰 스트레스를 받지만, 그 외에는 비교적 넉넉한 개인시간이 있는 편. 무엇보다 조종사들은 누구나 한번쯤 가져본 ‘직접 비행기를 조종해 하늘을 나는 꿈’을 이룬 사람이기 때문에 직업만족도가 높다. 어려운 점은 물론 많다. 비행 중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고, 어떤 직업보다 높은 집중력·책임감이 필요하다. 아무리 탁월한 경력을 갖춘 조종사라도 체력에 문제가 생기거나 기술적 능력이 떨어지면 조종간을 잡을 수 없다. 단 한 차례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다.


◆조종사가 되려면=무엇보다 시력을 포함해 까다로운 신체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상당한 수준의 어학(영어) 실력과 수학·과학·공학 분야에 대한 이해 능력도 필요하다. 일단 조종사가 되면 안정적인 고소득 외에도 인종이나 국적, 성별에 따른 차별이 거의 없다. 이미 국내 항공사에도 외국인 조종사가 많이 있고, 외국 항공사에 취업한 한국인도 적지 않다. 국내 여성 조종사는 아직 극소수지만 여성 차별도 없다. 신수진 기장은 “승객 안전을 책임지는 조종사의 성별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여자라고 무시할 수도, 봐줄 수도 없다”고 말했다.

조종사가 되는 방법은 공군사관학교 등을 나와 군 조종사 경력을 거쳐 취업하는 길과 민간 항공학교나 조종훈련생 과정을 거치는 방법으로 나뉜다. 대한항공의 경우 내국인 조종사 중 절반 정도가 군 경력자 출신이다.

군 경력자의 경우 공군사관학교 출신이 대부분이다. 항공 관련학과가 있는 대학의 학군사관후보생(ROTC)으로 조종사가 되는 방법도 있다. 일반 경력도 여러 가지 경로가 있다. 항공대와 한서대에 설치된 항공운항학과에서 기초적인 면장(라이선스)과 비행경력을 쌓은 뒤 각 항공사의 일반경력 조종훈련생 모집에 응시하는 경우가 많다. 일반 대학을 나와 비행경력 없이 응시할 수 있는 신입 조종훈련생 과정도 있지만 선발 인원은 많지 않다. 그래서 일반 대학을 나온 뒤 항공기 조종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유학하는 경우도 있다. 미국에는 일정한 비행경력을 쌓고 면장을 얻을 수 있는 4년제 항공대학이나 사설 비행훈련원이 많다.

 이승녕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자료 협조 : 인크루트 www.incruit.com



■선배 한마디

심리적 부담 크지만 인생 걸 만한 일이다

 아시아나항공 임문식(39·사진) 기장은 일반 대학(중앙대)을 나와 비행기 조종사의 꿈을 이룬 경우다. 1993년 조종사의 길에 들어서 2005년에 보잉 B737 기장이 됐다. 현재 국내선을 담당하고 있는 그는 2007년 사내 비행안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에게 ‘조종사로 사는 법’을 들었다.

-어떤 점이 가장 어려운가.

“승객의 안전을 책임져야 한다는 심리적 부담이 크다. 고객들은 조종사를 전적으로 믿는데, 이런 신뢰를 깨뜨리는 일이 없도록 항상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게 조종사의 숙명이다.”

-근무 여건은.

“휴일이나 명절, 밤낮을 가리지 않는 불규칙한 근무 환경을 피할 수 없다. 휴식 시간은 충분하지만 출퇴근하는 직장인이나 가족과 시간을 맞추기 어렵기 때문이다. 친지·친구와의 교류가 소홀해지기도 한다.”

-자기 관리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모든 조종사는 매년 최소 한 차례 이상의 정밀 신체검사를 해야 하고, 매년 세 차례 이상의 비행 검열을 받는다. 기종을 바꾸기라도 하면 훨씬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 늘 건강을 관리하고 기량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언제 ‘조종사가 되기를 잘했다’고 느끼나.

“좋아서 선택한 일이기 때문에 늘 자부심을 갖고 일한다. 아들(7)이 친구들에게 ‘아빠가 비행기 조종사’라며 자랑스럽게 얘기할 때는 특히 기쁘다.”

-어떤 사람이 조종사로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지.

“조종사는 철저한 자기 관리가 필요한 직업이다. 자신의 업무를 철저히 수행하기 위한 책임감도 있어야 한다. 스스로를 관리하고 발전시키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성품이 필요한 것 같다.”

-조종사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한마디.

“조종사로서 살아가려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 경조사는 물론 친구들과의 정겨운 술자리도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한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단련해야 한다. 하지만 하늘로 멋지게 날아오르고 안전하게 비행을 마칠 때마다 다른 어떤 일과도 비교하기 어려운 큰 보람을 느낄 수 있다는 게 매력이다. 인생을 걸 만한 직업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이승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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