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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돈피난처택스헤이븐을가다>中.투자액1,000만弗 넘는 고객 여권 만들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돈은 본래 햇빛과 세금을 싫어한다.”지하경제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 비토 탄지 박사(IMF이사)의 말이다.

세계의 택스 헤이븐에 엄청난 자금들이 몰려 드는 이유도 결국 비밀보호와 세금회피를 위해서다.그러나 워낙 규모가 커지다 보니 더러 꼬리가 밟힌다.

2년여 동안 독일 금융가를 휩쓸고 있는 코메르츠은행 사건이 좋은 예.95년8월 이 은행 룩셈부르크 현지법인의 직원이 고객명단을 빼내 거액을 요구하면서 독일 본점을 협박한 것이 발단이었다.고민끝에 코메르츠은행측은 경찰에 신고해 범인이 붙잡혔으나 문제는 이때부터 벌어졌다.

경찰은 범인에게서 압수한 2백여명의 고객명단을 독일 국세청에 넘겼다.독일 검찰청은 국세청과 합동으로 명단에 오른 고객들은 물론 독일유수의 은행들을 덮쳤다.서열 3위 민간은행인 코메르츠은행은 이후 은행장 이하 임직원들이 줄줄이 수사당국에 불려 가는 수난을 겪었다.

왜 고객명단 하나가 이처럼 엄청난 파문을 불러일으켰을까.바로 독일부자들이 세금을 피해 재산을 이웃 룩셈부르크로 빼돌리고 있다는 증거가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룩셈부르크는 외국인들의 예금이자 소득에 대해 원천징수를 하지 않는다.독일 국민은 외국에 예금할 수 있으나 이자소득에 대해서는 반드시 신고하고 세금을 내야 한다.그러나 룩셈부르크 예금의 이자소득은 현지에서 원천징수를 하지 않으니 신고하지 않아도 근거가 없다.바로 이 점을 노려 독일부자들의 돈이 국경을 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독일정부는 93년 통독(統獨)비용을 대기 위해 이자소득의 30%를 세금으로 원천징수하는 세제를 새로 도입했는데 이후 3년간 3천억마르크(약 1천8백억달러),우리 돈으로 무려 1백60조원 가까운 돈이 룩셈부르크 같은 택스 헤이븐으로 빠져 나간 것으로 추정된다.이 돈에 대한 세금만 제대로 거둬도 동독지역 복구비용을 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올 정도다.

카리브해 섬나라들은 천혜의 자연환경을 십분 활용한다.미국과 남미의 중간지역이라는 지리적 특성에다 풍부한 관광자원을 묶어 고객들을 유혹하고 있다.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고객의 구미에 맞춰 주는 금융서비스다.

바하마 시티뱅크의 개인고객 담당 로드랜드(여)는“비밀보장과 안정된 투자수익,철저한 계약이행이 영업의 3대 원칙”이라고 말한다.신탁예금 형태로 돈을 받으면 우선 이 돈으로 바하마에 회사(페이퍼 컴퍼니)를 하나 만든다.

보통 하루 정도 걸리지만 급할 때면 1시간안에 회사설립과 등록절차를 마칠 수 있다.이 회사 이름으로 런던이나 미국.싱가포르등 국제금융시장에서 돈을 굴려 준다.예금규모는 최소한 1백만달러가 넘어야 하지만 수수료등을 감안해 3백만달러 이상을 선호한다.현재 7천여개 안팎의 신탁펀드를 관리하고 있다.

케이맨 아일랜드는 바하마에 비해 은행.보험등 금융관련업종을 중심으로 번성하고 있는 것이 특징.세계 50대 은행을 비롯해 5백50개 안팎의 은행들이 인구 3만4천명 정도의 작은 섬나라에 간판을 걸고 있다.비토 탄지 박사는“이 섬에 몰려든 자금은 5천억달러 안팎에 달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금융기관수나 자금의 크기로 따져 세계 5위의 국제금융센터에 해당할 정도.오직 돈을 끌어들이기 위해 물불을 안 가리는 택스 헤이븐도 있다.

95년 조세피난처로'개업'한 세이셸 같은 경우 투자액이 1천만달러만 넘으면 돈의 출처를 묻지 않고,고객이 원할 경우 세이셸 여권까지 만들어 준다는 것.자금세탁이나 신분위장에는 그야말로 천국인 셈이다.

택스 헤이븐이 어느새 우리 곁에 가까이 다가선 만큼 걱정 어린 시각도 많다.한국은행 프랑크푸르트사무소 강형문(姜亨文)소장은“통일을 앞두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도 독일같은 자본도피사태에 미리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이번 취재여행을 함께 한 유한수(兪翰樹) 포스코경영연구소장은“우리도 자금세탁방지법 마련을 서두르면서 불법적인 돈세탁이나 자금이동을 막는 국제적 협력기구인 FATF(금융거래대책반)등과의 협력체제를 강화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프랑크푸르트=손병수 기자

<사진설명>

면적이 제주도보다 조금 큰 룩셈부르크에서는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2백22개의 금융기관들이 열띤 경쟁을 벌이고 있다.개인고객을 대상으로 하는 은행중에는 아파트에 은밀하게 사무실을 꾸며놓은 곳도 많다.사진은 금융기관들이 몰려있는 룩셈부르크의 중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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