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끼려면 화끈하게 … 그림자까지 똑같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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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떳떳하게 베꼈다. 오히려 제대로 못 베낄까봐 걱정했다.’ 7일 첫 전파를 타는 온스타일의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 얘기다. 이 방송은 디자이너를 꿈꾸는 도전자들이 각종 과제를 수행하며 경쟁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다. 미국 브라보TV의 인기 프로그램 ‘프로젝트 런웨이’를 대놓고 베꼈다. 세트 디자인은 물론 카메라 위치까지 그대로 흉내냈다. 제작진의 표현을 훔치면 ‘출연자들의 피부색 빼고는 모든 게 똑같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그렇다고 표절 아니냐는 시비는 걸지 마시라. 돈 내고 베꼈으니까. 제작진은 ‘프로젝트 런웨이’의 판권을 지닌 영국 프리멘탈사에 1억원을 내고 프로그램의 포맷을 정식 수입했다. 이미 검증받은 프로그램을 제대로 따라하는 편이 흥행 확률도 높다는 판단에서다. 당당하고 효율적인 모방이랄까.

온스타일에서 7일부터 방영될 예정인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와 미국판 ‘프로젝트 런웨이’(左)의 장면. 프로그램의 로고는 물론 무대까지 미국판을 그대로 재현했다. [온미디어 제공]


◆그림자까지 재현했다=돈을 지불했다곤 하지만 마음대로 베낄 수 있는 건 아니다. 지난해 5월 포맷을 수입하자마자 제작진에겐 700페이지 분량의 ‘엄청난 바이블’이 주어졌다. 세트 구성, 장비, 출연진 선정까지 꼼꼼히 기록해 놓은 일종의 제작 지침서다. 이 지침서를 그대로 따라 제작해야 한다는 게 계약 조건이다. 프리멘탈사 프로듀서 2명이 직접 한국을 방문해 제작진과 1박2일 워크숍도 열었다. “바이블에 적힌 대로 똑같이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이 컸다”는 게 제작진의 설명이다.

실제로 제작 현장에선 바이블을 펼쳐 놓고 미국판을 그대로 재현하기 위한 눈물 겨운 노력이 펼쳐졌다. MC 선정 기준부터 엄격했다. ‘모델 출신이 아니더라도 인지도는 높아야 한다’는 게 바이블의 지침. 제작진은 프리멘탈사에 “강호동 정도의 인지도가 있는 개그맨은 안 되느냐”는 질문을 던졌다가 “패션 관련 프로그램이니 개그맨은 곤란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결국 미국판의 진행자인 하이디 클룸이 모델이었던 것을 감안해 똑같은 콘셉트로 수퍼모델 출신인 이소라를 MC로 내세웠다.

영상을 그대로 재현하는 데엔 제약이 적지 않았다. 미국판의 제작비가 편당 5억원 수준인 데 비해 한국판은 전체 10회 분량 제작비가 7억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미국판은 실제 학교를 스튜디오로 꾸며 공간 활용도가 높은 편이지만 학교를 빌릴 형편이 안 됐던 한국판은 별도의 공간에 자체 세트를 만들어 옹색해졌다. 연출자인 이우철PD는 “공간이 좁다 보니 바이블에서 제시한 카메라 배치 등을 똑같이 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PD는 출연자들 앞에 늘어지는 그림자를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 조명과 카메라 위치를 바꿔가며 나흘간이나 똑같은 작업에 매달리기도 했다.

◆‘똑같이 잘 만들었다’는 판정=제작 여건상 미국판을 그대로 따라할 수 없는 경우도 많았다. 미국판의 경우, 유명 의류 회사에서 옷 디자인에 필요한 원단을 협찬하지만 한국판에선 도전자들이 직접 동대문 시장을 돌며 원단을 구입하러 다녔다. 또 출연자마다 별도의 음성을 녹취할 수 있는 오디오 시스템을 갖춘 미국판과 달리 한국판에선 천정 위에 마이크를 매달거나 등 뒤에 무선 마이크를 설치했다.

제작진은 이미 ‘프로젝트 런웨이’의 포맷을 수입해 방영한 캐나다·호주·말레이시아판 방송을 참고해가며 재현에 매달렸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으선 드물게 사전 제작으로 총 9회분까지 촬영을 마친 상태. 제작진은 7일 첫 방송에 앞서 최근 영국 프리멘탈사에 완성된 영상을 보여줬다. 바이블의 지침을 잘 따랐는지 일종의 시험을 치른 셈이다. 이PD는 “프리멘탈사에서 ‘똑같이 잘 만들었다’며 동의를 해주니 그제서야 마음이 놓이더라”고 말했다.  

정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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