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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는 왜 이리 슬픈가 … 김훈 소설 읽고 창작 결심했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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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항상 종이에 펜으로 작업하던 권가야씨가 『남한산성』에서 처음으로 컴퓨터 채색작업을 시도했다. 그는 “내 손 끝에서 나온 그림만 진짜라고 생각했는데 컴퓨터를 사용해 보니 의외로 편하고 작업 속도도 빠르더라”고 했다. [김재미 인턴기자]

 만화가 권가야(43)씨를 만나러 가는 길, ‘아마추어같이’ 긴장했다. 그의 만화를 접해본 사람이라면 이해하리라. 강렬한, 때론 지나치다 싶을 만큼 과격한 그림, 한편의 시처럼 현학적인 대사를 읊조리는 주인공들. ‘도대체 이런 만화를 그리는 건 어떤 사람일까’ 늘 궁금했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내놓는 작품을 제외하고는 ‘숨은 독립군’처럼 자신의 존재를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수수께끼의 작가. 게다가 이번 인터뷰의 주제는 ‘남한산성’이다. 전작 『해와 달』이나 『남자 이야기』에서 무협이라는 허구의 틀로 인생의 의미를 탐구했던 그가 이번엔 실제 역사에 전면승부를 선언한 것이다.

◆“권가야 나가서 돈 좀 벌어와라”=서울 강북구 수유동에 있는 그의 작업실 문을 여니 덥수룩한 수염에 비니를 뒤집어 쓴 작가가 달려나오며 기자를 반긴다. “아이고, 멀리까지 오느라 수고 많았소. 커피라도 한잔 드릴까?” 어라, 이건 무슨 초식? 함께 일하는 문하생들을 한명 한명 친절하게 소개해 주는 모습이 상상과는 딴판의 ‘명랑 아저씨’다.

허를 찔린 당황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필명 이야기부터 꺼냈다(만화계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많지만 그의 본명은 권기만이다). “‘권가야’라는 필명이 너무 멋진데요. 고대 가야국에서 무슨 영감이라도 받으셨는지….”

그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가야국은 무슨 가야국. 내가 결혼하고 애를 둘이나 낳고도 돈을 못 벌어오니 마누라가 만날 ‘권가야, 돈 좀 벌어와라’ ‘권가야, 애비 노릇 좀 하라’며 구박을 하더라고요. 계속 듣다 보니 그럴듯해서 필명으로 쓴 것뿐.”

◆치욕 속에서도 빛나는 생명력을 그린다=“얼굴만 보고 무서운 사람인 줄 알지만, 사실 난 쉬운 남자”라고 농담하던 그가 막상 작품 이야기로 들어가니 진지해진다. 최근 출간한 『남한산성』제1권은 부천만화정보센터가 기획한 ‘경기도 기전문화원형 만화창작화사업’의 첫 번째 결과물로 나온 작품이다. “처음 남한산성을 만화로 그려달란 제의를 받았을 땐 자신이 없었어요. 나는 역사를 공부한 사람도 아니고, 조선시대 벼슬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데 이걸 어쩌나 했죠.” 남한산성과 관련된 각종 기록을 찾아 읽고, 강화도와 남한산성을 발로 직접 밟아보고 김훈의 인기 소설 『남한산성』을 읽고 나서야 결심이 섰다.

“인조는 왜 저렇게 초라한가, 김상헌과 최명길은 왜 이렇게 불쌍한가, 우리 역사는 왜 이렇게 사람들을 슬프게 하는가 갈증이 났어요.” 역사라는, 전쟁이라는 굴레가 인간을 옥죄고 있을 때 그 굴레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뭘까, 그걸 이 작품에서 고민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김훈이 소설에서 남한산성에 갇힌 왕과 대신들의 47일간을 다뤘다면, 권가야는 남한산성 밖에서 하루하루를 견디던 백성들의 삶을 돌아봤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조선의 남쪽 마을 도촌리를 무대로, 특정 주인공도 없이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사연들이 전해진다. ‘권가야표’ 만화답게 독해가 쉽진 않다. 제한된 지면 안에 많은 이야기를 담으려다 보니 가끔은 컷과 컷이 연결성을 잃고 점프하기도 한다.

“인물이 아니라 상황 위주로 진행되다보니 잔재미를 주는 장치들이 적어요. 사람들이 두 번은 읽어야 이해가 간다고 해서 고민입니다.” 이미 6권까지의 줄거리를 모두 구성한 그가 찾아낸 해답은 ‘슬픔과 한’이다. “힘없는 나라에 살다 보니 저절로 체화되고야 만 인내와 슬픔. 이는 미움도 원망도 모두 승화돼버린 감정이죠. 그 눈물 앞에서 오히려 조선을 유린한 일본이 초라해지고, 청의 황제 칸이 초라해집니다. 그것을 작품 속에서 설득력있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만화계의 ‘마이너스 손’?=한 장면을 위해 때론 며칠씩을 투자하는 ‘장인 정신’ 탓에 그는 항상 가난했고 지금도 가난하다. 시대를 앞서갔던 만화 『해와 달』은 “너무 어렵다”는 평이 많아 허둥지둥 마무리해야 했고, 『풍운남아』도 잡지사가 망하는 바람에 접었다. “내 별명이 ‘만화계의 마이너스 손’이에요. 내가 연재만 시작하면 잡지가 망한다고 해서, 허허.”

‘오늘의 우리만화상’과 ‘대한민국 출판만화대상’을 안겨준 『남자 이야기』를 연재할 때도 원고료 200만원 받아 문하생들 먹이고 나면 남는 돈이 없어 집을 전세로, 다시 월세로 줄이며 살았단다. “그래도 만화를 계속 그리게 하는 힘은 무엇인가”를 물었다.

“의지와 열정이죠. 원하는 것을 이루려는 의지가 있고, 그 의지를 위해 열정을 불태울 수 있다면 그 삶은 행복한 거라 믿어요.”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만화가라는 자부심을 신념처럼 붙든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처럼 들렸다.

이영희 기자 , 사진=김재미 인턴기자

◆남한산성=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남한산에 있는 조선시대의 산성이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57호로 지정됐다. 신라 문무왕 때 쌓은 주장성의 옛터를 활용해 1624(인조 2년)~26년 현재 모습의 성이 완성됐다. 1636년 후금이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조선을 침략했을 때 인조와 세자가 이곳으로 피난해 47일간 버티다 항복했다. 소설가 김훈씨는 이때의 사료를 바탕으로 소설 『남한산성』을 썼다. 총 6권으로 기획된 권가야씨의 역사만화 『남한산성』은 ‘패배와 치욕의 성’이라는 남한산성의 종래 이미지를 새롭게 탐구해보려는 시도다. 경기도가 도 내에 있는 문화재들의 의미를 되살려보자는 뜻에서 시작한 ‘경기도 기전문화원형 만화창작화사업’의 하나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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