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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재현 시시각각

제정구와 남경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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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내가 그를 처음 본 것은 1987년 서울 상계동 재개발지역 철거 현장에서였다. 용역반원들이 달려들어 살던 집을 부숴버리자 주민들은 빈 터에 천막을 치고 농성에 들어갔다. 경찰이 매일 출동해 주민들과 대치했다. 훗날 경찰청장·대통령경호실장을 지낸 김세옥씨가 관할 경찰서장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경찰 담당 기자였던 나는 매일 현장에 출근하다시피 했다. 어느 날 작은 키에 신부님 비슷한 로만 칼라가 눈에 띄는, 눈빛이 유난히 형형한 사나이가 주민들 맨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가 제정구(1944~1999)였다.

나는 고(故) 제정구를 ‘성자(聖者)’로 칭해도 전혀 어색할 게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럴 만한 삶을 산 분이다. 그는 ‘빈민운동의 대부’로 불렸다. 명문대를 나와 운동에 투신했으면서도 끊임없이 자기 성찰을 한 구도자이기도 했다. 그도 한때는 단무지 장사에 나섰다가 “단무지 사이소”(경남 고성군이 고향이다)라는 말이 도저히 입에서 떨어지지 않아 사흘이나 괴로워했다. ‘마음속의 교만함, 머릿속의 지식, 서울대 출신이 이거 아니더라도 먹고살 수 있을 텐데 하는 허위의식’을 버리고 나서야 시원스럽게 “단무지 사이소”를 외칠 수 있게 됐다고 고백했다.

92년 14대 국회의원으로 정치판에 들어가서는 정치자금 공개, 화환 안 보내기, 청렴한 생활, 회의장 안 떠나기 등의 ‘청정선언’을 주도했다. 17년 전의 국회에서는 대단히 도발적인 선언이었다. 국회 건설위원회에 들어가 철거민 대책을 외쳤고, 동아건설 비자금 사건도 터뜨렸다. 그러나 15대 국회의원 시절 폐암에 걸려 정말 너무, 너무도 일찍 가고 말았다.

용산 재개발지역 철거민·경찰 참사라는 비극의 한 주역인 남경남 전국철거민연합 의장을 보면서 나는 고 제정구를 떠올렸다. 제정구는 72년 서울 청계천 판자촌의 활빈교회를 찾아갔다가 빈민운동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그의 인생은 싸움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폭력에 대한 태도는 남경남과 달랐다. 85년 서울 사당3동 철거 때 주민들도 ‘철거 깡패’에 맞선다며 격렬하게 폭력을 휘둘렀다. 제정구는 이를 혹독하게 비판했다. 발상 자체가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않고, 주민들 힘이 더 강할 수 없으며,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간디의 무저항 비폭력 정신이 철거민 운동에서 중시된 계기였다. 당시는 더구나 5공 독재시절이었다. 공권력의 정당성 정도가 지금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제정구는 “천사와 악마의 대결에서 천사가 악마를 향해 칼을 뽑아 드는 순간 악마는 이미 승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증오심으로 운동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도 했다(자서전 『가짐 없는 큰 자유』).

제정구는, 비록 애초 뜻과는 달랐지만 민주화 운동의 큰 흐름을 타고 국회에 진출했다. “20년간 젊음을 바쳤던 철거 문제와 서민들의 주거 문제의 진원지를 직접 상대할 수 있는 기회”라고 마음을 다져 먹었다. 그러나 남경남이 몸담은 전철연은 4년 전 경기도 오산 재개발지구에서 화염병을 터뜨려 20대 젊은이를 불타 숨지게 하고도 폭력 일변도의 행태를 그치지 않았다. 집권 여당(새천년민주당) 당사에 들어가 화염방사기를 휘두른 것도 전철연이었다. 남씨와 일부 전철연 간부가 재개발 인근지역 토지·상가를 사고 팔아 재산을 불렸다는 의혹만은 사실이 아니길 빈다. 시대의 엄혹성, 상황의 절박성, 공권력의 정당성, 다른 해결 방법의 유무 등 모든 면에서 제정구 시대와 남경남 시대는 큰 차이가 있는데, 왜 한쪽은 벌거벗은 폭력에만 의존하려 드는지 안타깝다.

남씨에게도 할 말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화염병·화염방사기·시너·새총·골프공 같은 살상 수단이 정말로 서민 주거권의 보루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그는 제정구를 배워야 한다. 마침 열흘 뒤인 2월 9일은 고 제정구의 10주기 날이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