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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시대를 앞서갔지만 신하를 설득 못 한 군주의 비극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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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아무리 좋은 정책도 주위의 뒷받침이 없으면 성공할 수 없다. 광해군은 당시 명나라를 성리학적 관점이 아니라 현실적 관점으로 바라본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광해군의 이런 외교관을 야당인 서인·남인은 물론 여당인 대북의 당론으로도 삼지 못했다. 서인은 ‘강홍립의 투항이 광해군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며 쿠데타 명분으로 삼았다. 시대를 앞서간 군주의 비극이 여기에 있었다.

조선 후기 김후신(金厚臣)이 그린 양수투항도. 강홍립이 후금에 투항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충렬록(忠烈錄)』의 일부분이다. 사진가 권태균

임진왜란 이후 명 사신들의 태도는 이전과 달라졌다. 임란 전에는 최소한 대국의 체통을 지키느라 국왕이 주는 선물도 사양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으나 임란 후에는 노골적으로 뇌물을 요구했다. 그런 최초의 사신이 선조 35년(1602) 명의 황태자 책봉을 알리러 온 고천준(顧天埈)이었다. 『선조실록』의 사관은 고천준에 대해 “의주에서 서울까지 수천 리 동안 이리같이 탐욕스럽고 계곡처럼 무한한 욕심으로 마음껏 약탈해 인삼·은·보물을 남김없이 가져가 조선 전역이 병화(兵火)를 겪은 것 같았다”고 비난하고 있다.

윤국형(尹國馨)이『갑진만록(甲辰漫錄)』에서 그의 행위에 대해 “말하면 입만 더러워진다(言之wl口)”고 할 정도였다. 고천준은 문관인 한림(翰林)이었다. 환관인 태감(太監)들이 올 때는 말할 나위 없었다. 광해군 1년(1609) 조선 국왕의 책봉례(冊封禮)를 주관하기 위해 왔던 태감 유용(劉用)에 대해『갑진만록』은 “처음 국경에 들어올 때 반드시 은자 10만 냥을 얻겠다고 말하더니 서울까지 오는 동안 얻은 은자가 거의 5만~6만 냥에 이르렀다”면서 “은으로 바치면 차나 식사 대접이 없어도 좋다”고까지 말했다고 전한다.

광해군 2년(1610) 사신으로 온 태감 염등(염登)에 대해 윤국형은 “은을 탐내는 것이 유용보다 배나 더했다. 나라가 장차 어떻게 지속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고 한탄할 정도였다. 이는 비단 환관들만의 문제가 아니라,『선조실록』에 “이때 중국 조정에는 탐욕스러운 풍조가 크게 일어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졌다”(1935년 6월 14일)는 사관의 평처럼 명나라 전반의 문제였다. 명나라는 말기적 증상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때는 만주에서 여진족 통일의 기운이 높아지고 있을 때여서 뇌물이나 챙길 때가 아니었다. 중원의 한족(漢族)은 평소 여진족을 비롯한 주위 민족들을 기미책(羈미策)으로 다스렸다. 기(羈)는 말의 굴레를, 미(미)는 소의 고삐를 뜻하는데, 겉으로는 자치권을 주는 듯하지만 속으로는 한족이 고삐를 쥐고 지배한다는 뜻으로 현재도 중국 공산정권이 소수민족을 통치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기미정책의 핵심은 해당 민족들을 서로 싸우게 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인데, 이 무렵 여진족은 셋으로 나뉘어 있었다.

흑룡강과 연해주 지역에 거주하던 야인(野人) 여진, 송화강 유역의 해서(海西) 여진, 그리고 목단강 유역에서 백두산 일대에 거주하는 건주(建州) 여진이었다. 명나라는 이 셋을 서로 반목시켜 다스려 왔는데, 임란 직전 명나라 요동총병관(遼東總兵官) 이성량(李成梁)은 이여송(李如松)의 부친이기도 했다.

『명사(明史)』 이성량 열전은 “그의 고조할아버지 이영(李英)이 조선에서 귀화(內附)했다”고 적고 있으니 원 뿌리는 조선 사람이었다. 이성량은 1583년 해서 여진의 아타이(阿台)가 명나라에 반기를 들자 건주 여진을 거느리고 토벌에 나섰다. 이때 이성량의 향도(嚮導)로 나섰던 타쿠시(塔克世)와 교창가(覺昌安)가 명군의 오인 사격으로 사망하는데, 이들은 각각 누르하치(努爾哈齊:1559~1626)의 부친과 조부였다.

누르하치는 이때부터 여진족 통일에 나서 5년 후인 1588년께에는 건주 여진을 대부분 통일했다. 4년 후 발생한 임진왜란은 누르하치에게 날개를 달아줘 누르하치는 선조 25년(1592) 9월과 선조 31년(1598) 1월 조선에 구원군을 보내 주겠다고 자청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조선은 파병을 거절했지만 그간 조선의 벼슬을 받기 위해 서로 싸우던 여진족이 새롭게 대륙의 강자로 등장했음을 말해 주는 사례였다.

드디어 광해군 8년(1616) 누르하치는 스스로를 영명칸(英明汗)이라 칭하면서 금(金)나라를 재건하고 천명(天命)을 연호로 사용했다. 2년 후인 광해군 10년(1618) 4월에는 “명나라가 내 조부와 부친을 죽였다” “명나라가 우리 민족을 탄압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은 ‘7대한(七大恨)’을 발표하고 현재의 요령성 무순(撫順)시를 공격해 함락시켰다. 충격에 휩싸인 명나라 경략(經略) 왕가수(汪可受)는 그해 윤4월 27일 광해군에게 글을 보내 군사 파견을 요청했다. 수만 군사를 보내 여진족을 협공하면 반드시 승리할 것인데, 이것이 명나라에 보답하는 길이자 조선에도 무궁한 복을 안겨 주는 일이 될 것이란 논리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조명군(助明軍)을 보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명이 임란 때 파병한 것은 명나라가 아닌 조선을 싸움터로 결정한 고육지책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광해군은 고민 끝에 그해 5월 1일 전교를 내렸는데 국경 너머로 군사를 보내는 대신 “급히 수천 군병을 뽑아 의주(義州) 등지에 대기시켜 놓고 기각(기角:협격)처럼 성원하는 것이 지금의 상황에 적합할 듯하다”는 내용이었다. 군사를 파견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광해군의 이 결정에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집권 대북의 실세 이이첨(李爾瞻)과 광해군의 처남 유희분(柳希奮)까지 군사 파견을 강력히 주장했다. 대북은 다섯 달 전 서인·남인의 격렬한 반발을 무릅쓰고 인목대비를 폐위시켰다. 폐모(廢母)라는 소모적 정쟁에는 목숨 걸고 싸우던 당파들이었지만 국익에 반하는 조명군 파견에는 당론이 일치했다. 대제학 이이첨은 승문원 관원을 통해 “신은 성상께서 염려하시는 뜻을 잘 알고 있습니다만 중국에 난리가 났을 때 제후가 들어가 구원하는 것이『춘추(春秋)』의 대의이자 변방을 지키는 자의 직분입니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재조(再造:조선을 구해 줌)의 은혜로 오늘에 이른 것이니 추호라도 황제의 힘을 보답할 길을 모를 수 있겠습니까?(『광해군일기』 10년 5월 5일)”라고 항의했다.

여야 모두에게 고립된 광해군으로선 파병을 피할 방법은 없었다. 할 수 없이 광해군은 강홍립(姜弘立)을 도원수로 삼았다. 강홍립은 문과 급제자였지만 어전통사(御前通事)까지 겸할 정도로 중국어에 능했다. 강홍립은 광해군 11년(1619) 2월 1만3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창성(昌城)에서 압록강을 건넜다. 강홍립이 접해 본 명군은 이미 후금의 상대가 아니었다. 명군 도독 유정(劉綎)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왜 군대를 요청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양 대인(大人:양호)과 나는 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으므로 반드시 내가 죽기를 바랄 것이다”고 답할 정도로 명군은 분열돼 있었다. 열흘치 식량만 갖고 국경을 넘은 조선군은 식량 공급도 원활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때 종군했던 조선 장수 이민환(李民환)은『책중일록(柵中日錄)』에서 3월 2일 심하(深河)에서 처음으로 후금군 600여 명을 격퇴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조선군은 승전의 기쁨 대신 양식을 찾아 헤매야 하는 형편이었다. 조선군은 후금의 주력부대와 3월 4일 심하에서 다시 맞붙는데 공명심에 눈이 먼 명의 총병(摠兵) 두송(杜松)이 계획보다 하루 일찍 출발했다가 복병을 만나 전멸했고, 도독 유정의 선봉부대까지 전멸당한 상태로 후금의 정예와 맞붙었다.

선천부사 김응하(金應河)가 이끄는 좌영은 화포로 후금의 기병을 격퇴시켰으나 갑자기 서북풍이 거세게 불면서 화약을 잴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후금의 막강한 철기군이 공격하자 패할 수밖에 없었다. 강홍립은 전원 전사의 길을 택할 것인지 항복할 것인지 갈림길에서 항복을 선택했다.

『광해군일기』 11년 4월 8일조의 사관은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비밀리에 하유하여 노혈(虜穴)과 몰래 통하게 했기 때문에 심하의 싸움에서 오랑캐 진중에서 먼저 통사를 부르자 강홍립이 때를 맞추어 투항한 것이다”고 비난하고 있다. 이것이 광해군 축출의 명분이 된 사전 각본에 의한 항복론이었다.

그러나 여러 사료를 종합해 보면 후금에서 먼저 여러 차례 투항을 권유했고 강홍립은 막다른 궁지에서 자신과 부하들의 생존을 택했을 뿐이다. 광해군은 동아시아의 운명을 가를 이 싸움이 청(후금)의 승리로 끝날 것을 예견한 조선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는 재위 13년(1621) 명나라가 크게 승전했다는 보고를 듣고 “중국인(唐人)의 허풍은 전부터 한두 번이 아니니 어찌 경솔히 믿을 수 있겠는가(『광해군일기』 13년 12월 6일)”라고 일축했다.

그러나 허풍 센 중국인을 부모의 나라로 섬기던 서인은 광해군의 현실적 외교관을 ‘황제의 은혜에 대한 불충’이란 명분으로 몰아세우면서 쿠데타를 준비했다.

<다음 호에 계속>

이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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