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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지도>53. 극작가들 (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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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영국인들은'셰익스피어를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했다.제국주의의 오만이 서린 이 말의 뜻은 물론 셰익스피어의 위대성을 강조한 것이다.4백여년전 셰익스피어가 평생에 쓴 37편의 희곡작품들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며 보편적인 인간사의 진리를 일깨워주고 있다.'해가 지지않는 나라'영국의 세력은 미약해졌지만 셰익스피어만큼은 지금도'해가 지지않는 인물'로 영원히 빛나고 있고,앞으로도 그 빛은 사그라들지 않을 것이다.셰익스피어에 필적하진 못하더라도 한나라가 이처럼 좋은 작가(극작가)를 갖고 있다는 것은 큰 유산이자 행복이다.

작가의 유형에는 여러가지가 있다.소설과 시를 쓰는 일반적인 작가가 있는 반면,TV나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도 있고 연극대본을 쓰는 극작가도 있다.장르를 불문하고 작가는 그 장르의'흥망성쇠'를 결정짓는 열쇠를 쥐고 있다.

여타 장르에 비해 연극의 대본을 쓰는 극작가는 양과 질에 있어 타분야에 비해 답보상태 혹은 퇴행의 길에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이러한 형편을 일거에 역전시켜줄'한국판 셰익스피어'탄생에 대한 갈망은 연극계 전체의 염원이기도 하다.

한때 우리나라에서도 극작가가 시대를 밝히는 등불이던 시절이 있었다.우리는 그런 전통을 갖고 있다.암울하던 일제의 폭압시절 민족계몽에 앞장섰던 이들중에는 극작가가 많았다.

춘원 이광수를 비롯,조일재.윤백남.김우진.유치진.함세덕.김영팔.채만식.송영.이태준.유진오.한설야.오영진등.이들은 요즘처럼 작가의 전문화.분업화가 이뤄지기 이전 극작에 몰두하며 한국의 사실주의 연극을 개척한 선구자들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들의 사후 반세기이상이 흐른 지금 극작가 세계는 이러한 선배들의 찬란한 전통과 맥을 잇지 못하고 지리멸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지경에 이르렀다.

연극계의 공통적 상투어가 하나 있다.연출가든,배우든,혹은 극작가 자신이든 늘 입에 달고 다니는'쓸만한 작품이 없다'는 말이 그것이다.'쓸만한 작품이 없다'는 것은 곧'쓸만한 작가'의 부재를 의미한다.실제로 현재 1년에 한두 작품의 신작이라도 꾸준히 내며 창작무대에 기여하는 극작가는 거의 손에 꼽힐 정도다.그나마 그 활동력도 대부분 연출 겸업의 극작가쪽이 왕성한 편.극작에만 전념하는 전업작가의 활동은 여러 형편상 미진한 실정이다.

현재 한국연극협회 극작분과위원회에 소속된 작가들은 30명 남짓.비회원으로 독자활동을 펼치고 있는 극작가들을 합해 봐야 고작 50명 내외의 사람들이 극작활동에 매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이중 정말로 작품다운 작품을 꾸준히 내며 존재가치를 알리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한 실정이다.

현재 극작분야의 최고 원로는 청주대교수를 지낸 차범석(73)씨.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밀주'가 입선돼 극작활동을 시작한 그는'사실주의 신봉자'로서 현대연극의 발전을 주도한 중추적 인물이다.지금도 매년 정초때면 연출가.배우.극작가를 불문하고 신년하례객으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원로다.그는 3년전에도'바람분다 문열어라'란 신작을 내는등 만년 현역을 고집하고 있지만 예전같은 정력적 활동은 기대할 수 없다.

차씨의 뒤를 이어 50,60대 후배그룹으로는 이근삼(68).박조열(67).노경식(59).윤대성(58).윤조병(58).오태석(57).김상열(56)씨등이 포진하고 있다.이들중 연출 겸업의 오태석(극단 목화대표).김상열(극단 신시대표)을 제외하고는 최근들어 신작보기가 그리 쉽지 않다.

아무래도 작가적 역량의 강도나 세대적인 이점 때문에 가장 각광받으며 주목해야 할 집단이 이들의 뒤를 잇는 40대 혹은 50대 초반의 작가군이다.몇해전 서울예전교수를 그만두고'전업작가'로 나선 이강백(50)을 비롯해 김광림.이윤택.이상우.이만희등 40대'4인방'과 그리고 여성작가로 거의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정복근(50)등이 이 그룹을 이끌고 있다.

지난해 서울연극제에'뼈와 살'을 선보였던 이강백은 우화적인 풍자와 위트가 뛰어난 작가.'문화게릴라'이윤택은 자타가 인정하는 연극계의 문제작가며,80년대 연우무대의 전성기를 일궈냈던 김광림(연극원교수).이상우(극단 차이무대표) 또한 자기색깔이 분명한 연출겸업 작가다.

12일부터 연출자 강영걸과 함께 시리즈무대를 마련할 이만희는 무엇보다 말(대사)을 중시하는 작가로'불좀 꺼주세요''피고지고 피고지고'등 다수의 히트작을 갖고 있다.이밖에 최근 막을 내린'나,김수임'의 작가 정씨는 특히 역사적 인물에 대한 세밀한 관찰과 복원에 강점을 갖고 있다.'덕혜옹주''세종32년'등이 그의 최근작. 비 록 작가의 절대수 부족에다 역량부족이 겹친 극작계의'난맥상'으로 인해 몇몇 유명작가에의 의존도가 지나쳐 연극의 다양성을 저해하고 있지만 미래의 꿈나무들은 역시 20,30대다.최근들어 이들의 싱싱한 싹이 곳곳에서 보여 미래가 결코 암울하지만은 않다며 연극계가 약간은 들떠 있다.

장차 연극계 꿈나무들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신예작가로는'종로고양이''남자충동'등을 쓴 조광화(32).그는 평단의 호평과 함께 관객끌기에도 성공한'남자충동'의 연출까지 맡아 겸업시대를 열었는데,오랜만에 대중적 취향을 연극적인 방법론과 잘 결합시킨 수작을 만들었다.이밖에'쇼코미디'등의 대본을 쓰는등 뮤지컬 지향의 오은희와 김윤미.장진등이 계속 눈여겨볼 젊은 극작가들이다.

이와같은 몇몇 작가들의 분발에도 불구하고'작품이 없다'는 상투어가 비등하는 것은 역시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의 다양성이 막혀있기 때문.한 작가의 고정화된 작품경향이 타파된'5욕7정'을 관객들이 연극무대란 공간에서 대리체험하기 위해서는 보다 능력있는 많은 작가들의 배출이 전제돼야 함은 당연하다.

현재 신예작가들은 일간지 신춘문예로 등단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매년 봄'신춘문예단막극제'를 통해 기성무대에 첫인사를 한다.그러나 몇년뒤 이들이 연극계에서 제대로'홀로서기'를 이루는 예가 극히 드물어 보다 적극적으로 연극계가 이들을 키우며 독려해주는 아량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기성작가의 경우 공연의 성격에 따라 편당 작품료는 3백만원에서 1천만~2천만원까지 편차가 큰 편.'전업작가'로서 대본만 써 살림하기엔 어려운 실정이어서 적당한 돈벌이를 겸하는 경우가 많다.그래서 외로운 극작가의 길을 고집하는 이가 드문지도 모른다. 정재왈 기자

<사진설명>

이윤택이 극을 쓰고 연출한'문제적 인간 연산'에서 유인촌과 이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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