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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눈>反개혁 목소리가 아쉽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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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정치적 혼란,그리고 정권 말기적 현상에 아랑곳없이 경제관료들은 영일이 없는 것 같다.경제부처들은'레임 덕'이란 말을 무색케할 정도로 바삐 돌아간다.

그런데 이상한 일도 있다.하필이면 이 혼란기에 경제관료들의 개혁정신이 느닷없이 왕성해지고 있으니 말이다.어느날 갑자기 금융개혁위원회를 대통령 직속기구로 만들어 금융계에 폭탄을 까넣는가 하면,금융실명제를 완화한다면서 자금세탁방지법을 만들어 검은 돈을 발본색원하겠다지 않나,차금(借金)경영의 못된 버릇을 뜯어고치겠다며 빚 많은 기업에 세금을 중과하겠다는 기발한 정책까지 동원하고 나섰다.

하나하나가 모두 절실한 과제들이다.그동안 수없이 시도됐으나 도중하차했던 난제(難題)들이기도 하다.경제가 어렵고,선거철이 닥치는데도 이처럼 구조개혁작업을 밀어붙이는 기세가 정말 뜻밖이다.복지부동은 커녕 용기에 감탄할 지경이다.

개혁의 선봉장은 역시 강경식(姜慶植)경제부총리.무궁무진한 아이디어맨,왕성한 추진력,불굴의 소신파 등 닉네임에 걸맞게 그는 취임초부터 손바람을 일으켜 왔다.그가 쏟아내는 아이디어를 소화해내느라 실무자들은 밤낮으로 전전긍긍이다.

개혁이라고 하면 김인호(金仁浩)경제수석도 뒤질 생각이 없는 인물이다.공정거래위원장 시절 재계뿐 아니라 정부내의 다른 장관들로부터까지 미움을 샀을 정도의 소신파다.

시간이 없으니 더욱 서두를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姜부총리 스스로도 모든 개혁추진은 6월말까지 끝장을 봐야 한다며 독려하고 있다.대통령선거전이 본격화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최근의 개혁추진과정은 도무지 정신차릴 수가 없다.배가 산으로 가는건지,바다로 가는건지.부도방지협약이라는 것이 좋은 예다.대기업들의 연쇄부도현상이 심각해지자 정부가 내놓은 위기관리 처방이다.

하지만 정책의 앞뒤가 너무 안맞는다.한쪽에서는 시장원리회복을 부르짖으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극단적 반(反)시장적인 정책을 펼치고 있으니 말이다.더구나 말끝마다 시장주의를 강조해온 姜부총리 스스로도 자기 손으로 이런 처방을 내릴줄은 미처 몰랐을 것이다.그뿐 아니다.부도방지협약으로 빚더미 회사의 부도를 막아주면서 다른 한편으론 빚많은 기업들에 세금공세를 펴겠다는 정책을 불쑥 내놓는 것은 또 무엇인가. 금융실명제를 완화하면서 자금세탁방지법을 만들겠다는 것도 마찬가지다.경제위축을 걱정해 완화책을 선택해 놓고 개혁정신을 살린다는 명분으로 더 강한 처방을 곁들여 놓았으니 어떻게 하자는 건지 모르겠다.

과연 최근 정부가 쏟아내고 이른바 개혁정책들중에 정부내의 의견수렴을 거쳐 입법화까지 갈 수 있는 것이 몇퍼센트나 될지 의문이다.

원칙을 회복하고 원칙대로 하자는데 반대가 있을 수 없다.그러나 한손으론 원칙을 세우고,다른 한손으론 그 원칙을 깨는 식의 개혁은 혼란만 가중시킨다.

개혁의 당위를 늘어놓는 것은 아마추어 몫이다.여론의 열화같은 지지,정치인들의 비분강개를 합치면 세상에 안될 개혁은 없을성 싶다.그러나 성공한 개혁은 손에 꼽을 정도요,실패한 개혁은 헤아릴 수도 없는게 지금까지의 경험이다.

경제개혁의 순위매김과 실천여부는 프로의 영역이다.지금부터라도 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벌어지는 낭비와 비효율을 줄여야 한다.개혁이 유행일 수는 없다.저마다 개혁을 외칠 때 이에 맞서 반(反) 개혁적 목소리를 주저없이 내는 것이야말로 용기있는 프로만 할 수 있다.그것은 개혁의 성공을 반대하는 소리가 아니라 개혁의 실패를 막자는 소리다.

정치적 혼란이 갈수록 더해가고 시간이 촉박함은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이다.의욕과 명분만 앞세웠던 3년전의 금융실명제,그리고 시간의 촉박함을 이유로 밀어붙였던 노동법 개정이 어떤 부작용을 빚었는지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이장규 경제1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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