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악법 대 약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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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달변의 정치가였던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어느 날 느닷없이 ‘복지 여왕(welfare queen)’이란 말을 꺼냈다. 복지 배급품을 받으면서 캐딜락을 모는 여성의 비도덕성을 공격한 것이다. 시민들은 세금이 그런 사람들에게 쓰인다는 사실에 경악했고 그런 복지현실에 분노했다. 백악관이 복지제도의 대대적 수술 작업에 나서는 데는 복지여왕 그 한마디로 족했다. 실제로 복지여왕이 존재했는지, 얼마나 많았는지는 아무도 몰랐고 상관도 없었다.

복지여왕은 미국의 복지 난맥상을 규정하는 강력한 프레임(개념틀)이었다. 프레임은 개혁정치의 성패를 좌우할 만큼 중요하다. 일단 사람들의 마음에 각인된 프레임은 좀처럼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85건에 달하는 한나라당의 입법안을 싸잡아 ‘MB악법(惡法)’으로 규정한 민주당은 이 단순하기 짝이 없는 프레임 하나로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법안의 숫자도 많거니와 그 내용도 헷갈리던 차에, 온갖 미디어와 TV 화면에 반복 노출된 단순명료한 이 반대 구호가 의외로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주었던 것이다. 비록 그것이 법안 취지와 예상 효과의 특정 부분을 과도하게 부풀린 것이라 해도 MB악법이라는 프레임은 법안 상정을 막는 어떤 행동도 정당하다고 부추긴다. 그래서 해머로 내리쳤고 전기톱으로 잘랐다. ‘해머’ 의원과 ‘공중 부양’ 의원이 지탄의 대상이 되기는 했지만, 일단 프레임을 선점한 민주당의 위세가 흔들린 것은 아니다.

2004년 가을, 노무현 정권 시절 ‘4대 개혁입법’으로 열린우리당 386 의원들에게 호되게 당해 본 경험이 있는 한나라당이 무더기 입법안을 추진하면서 ‘작명’에 신경쓰지 않았다는 것은 정치감각 결핍증으로밖에 이해되지 않는다. 개별 법안의 명칭이 아니라 정치적 의미를 규정하는 문패 같은 것 말이다. 정권의 운명을 가를 초기 전투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렇게 기세등등했던 386 의원들도 ‘국가보안법 폐지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자 후방으로 물러나야 했다. 마찬가지로, 개혁의 핵심 법안들을 다룰 2월 국회에서 집권 여당이 밀리면 이명박 정권은 서서히 고사의 길을 걸을 것이다. 그런 중대한 정국임에도 공개석상이나 TV토론에 나온 한나라당 의원들마저 MB악법이란 말을 자주 언급하는 것은 프레임 전쟁의 기초를 모르는 소치다. 프레임을 부정하는 것조차 그것을 강화해 주기 때문이다. “악법이 아니야!”라고 소리치면 사람들은 ‘악법이구나!’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얼마 전 노건평씨가 “한푼도 받은 일이 없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그가 돈받는 모습을 상상했다.

한나라당이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려 대항개념을 찾아 나섰는데 그게 그렇게 쉽지는 않은 모양이다. 궁리 끝에 고안한 것이 ‘악법’의 의미를 뒤집고 운율은 맞춘 ‘약법(藥法)’이다. ‘할머니 약손’처럼 뭔가 치유해줄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기기는 하는데, 어물전에 엿판 행상을 하나 차린 것처럼 궁색하다. 한나라당으로서는 ‘악법’이 지배하는 담론 공간에 교두보를 설치하는 일이 급해지기는 했다. 인구의 절반 이상이 이동하는 설 연휴가 다가오기 때문이다. 친인척이 둘러앉은 자리에선 서로의 근황이 오고 간 다음 경제난국과 폭력국회가 공통 화제로 오를 것이다. 경제위기야 깊은 한숨을 공유하면 되겠지만, 폭력국회에 대해서는 온갖 설과 변이 오고 갈 것이다. 그러다가, 누군가 MB악법을 들먹이면 반박하기 난감해진다. 반박했다간 반민주, 반서민, 친재벌론자로 몰리기 십상이다. 프레임이란 얼마나 무섭고 위력적인가.

이 상황을 한껏 즐기고 있는 민주당은 물론 국민 대다수가 ‘악법 프레임’에 갇혀 꼼짝달싹 못하고 있다면 그거야말로 문제다. 쟁점 법안들을 민주 대 반민주, 서민 대 반서민이라는 20세기적 발상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대한민국의 미래 적응력을 얼마나 키워낼 수 있는가의 여부로 따지는 것이 옳다. 가장 변화 속도가 빠른 미디어와 금융 분야 관련 법안들이 특히 그러하다.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와 아날로그 시대를 관장했던 법체제로 미래를 경영할 수 없지 않은가. 민주당은 모든 쟁점 법안에 ‘재벌 특혜’라는 딱지를 덕지덕지 붙였다. 그럴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리스크를 감내하지 않고 기술융합 시대와 첨단 금융의 벽을 뚫을 수 없음은 자명하다. 이제는 친재벌 대 반재벌의 인식구도를 ‘재벌 활용론’으로 전환할 때도 됐다. 2월 국회가 이 낡고 식상한 이분법으로 난장판이 되는 것, 거대 여당이 작고 매서운 야당에 몰려 흐느적대는 한국적 진풍경을 다시 보고 싶지 않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