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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우리는 왜 두려워하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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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글로벌 금융위기를 예언했던 루비니 미국 뉴욕대 교수는 은행계의 안일함을 주목하면서 제2차 대재앙의 가능성을 다시 경고했다. 현재 세계가 앓고 있는 진통은 맛보기에 불과할 뿐 본격적인 폭발의 마그마가 꿈틀거리고 있음을 누구도 심각하게 인식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화폐전쟁』의 저자 쑹훙빙(宋鴻兵)도 다음번에는 파상상품과 ‘쓰레기 채권’들에 투자한 상업은행의 부실이 한꺼번에 뭉쳐 원폭처럼 터질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럴까, 아닐까? 이론과 실전 지식을 두루 갖춘 최고의 고수들도 오락가락하는 판에 서민들은 갈피를 잡지 못해 두렵기만 하다. 지금 세계와 한국을 쑥대밭으로 만든 금융위기가 몇 년 전 이미 예고됐던 것임에도 정쟁과 현안에 매몰돼 속수무책이었던 우리의 무지한 행태를 생각하면 두려움을 떨칠 수 없다. 마이너스 성장만은 저지해야 한다는 정부의 결연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국제통화기금(IMF)은 한국에 -4% 도장을 찍었다. 8% 성장을 마지노선으로 결사항전 중인 중국도 실은 4% 성장이 어렵다는 게 자체 진단이라면, 중국과 미국 시장에 사활을 건 한국으로서는 출구가 막혔다. 굉음을 일으키며 수직 낙하하는 모든 경제지표의 동반 추락이 힘도 대안도 없는 서민들을 심리적 공황 상태로 몰아넣는 이유다.

한국 경제는 이미 최악에 다가서고 있다. 기업주와 자영업자들은 하루하루 버티기도 힘겹다. 달리 움직일 방법이 없고 그래 봐야 수렁에 더 빠질 뿐 착착 다가오는 최후의 심판을 덤덤히 기다리는 게 낫다는 자포자기의 심정인 듯하다. 여기에 원폭과 같은 제2차 폭발이 발생한다면?

이 심리적 공황 상태는 1929년 대공황 때도 그러했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공포에 떠는 나라를 향해 “진정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라고까지 했겠는가? 뉴딜은 두려움과의 싸움이었다. 미쳐 날뛰던 자본주의가 한순간에 거꾸러진 것이 두려웠고, 구사회생을 위한 뉴딜의 극약 처방들이 두려웠다. 반(反)뉴딜 세력의 맹렬한 저항을 무마하면서 노련한 정치가 루스벨트는 쓰러진 미국 경제에 ‘3R’을 투여했다. 3R-구제(Relief), 경제부흥(Recovery), 구조개혁(Reform)-은 당시로서는 지극히 낯설고 새로운 방법이었다. 오바마가 연대(連帶)전략의 귀재인 링컨과 규제 혁신의 달인인 루스벨트의 초상을 양손에 들고 미국 국민의 절망감을 달래게 된 역사적 배경이다.

그렇다면 ‘MB표 뉴딜’은 어찌되고 있는가? 지난달 30일 밤, TV 원탁대화에 나선 대통령은 해박하고 논리 정연했다. 패널리스트들이 던진 불편한 질문들도 척척 받아넘겼다. 장·차관회의를 소집해 ‘새로운 시작’을 하달하는 대통령의 표정은 비장했다. 대통령도, 각료와 관료들도 ‘MB표 뉴딜’을 들고 동분서주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좀처럼 두려움이 잦아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기에 까닭 모를 공허감마저 슬그머니 자리를 잡는다. 큰 울림까지는 아니어도 확신이 서질 않는다. 한국의 보수 리더가 차용한 이 뉴딜정치에 국민이 공감하고 있는지 불확실한데다 지난 시대의 냉소적 습관도 작용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더 근본적 차이가 있다. 우선 통치력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당시의 대표적 규제 이론가 제임스 랜디스와 금융계 대부인 조셉 케네디(존 F 케네디의 아버지)를 공격수로 선발해 온 국민을 뉴딜 정국으로 몰고 갔다. 즉각적이고 맹렬한 조치들이 취해졌다. 뉴딜은 과잉 생산과 과잉 경쟁에 대한 강력한 처방이자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시대정신이었다. 우리의 MB는 그만한 통치력을 구사하고 있는가? 그럴 만큼 ‘MB표 뉴딜’은 혁신적 발상과 혁신적 조치로 가득 차 있는가? 그렇다면 건설·조선산업의 구조조정은 왜 그토록 미진했는가? 둘째, 국민적 공감대를 촉발하기 위해 뉴딜 행정부는 국가부흥청(NRA)을 창설해 전권을 부여했고, 사안마다 합의 체제를 운영했다. 합의 정신을 상징하는 파란 독수리 문장이 전국에 나부꼈다. 우리의 경우 이제야 노·사·민·정 위원회가 꿈틀거리고 있는데, ‘MB표 뉴딜’은 국민의 의욕을 얼마나 지피고 있는가? 셋째,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가? 울상을 짓던 은행들은 단단해졌는지, 경기부양책들은 제대로 집행되는지, 내 일자리는 무사할 것인지, 도대체 뉴딜 시계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국민은 알 수 없다. 경제 체질을 통째로 바꿔야 겨우 수습이 된다면, 정부만 부산을 떠는 ‘워룸 뉴딜’이 아니라 국민의 마음을 절절히 사로잡는 ‘거국적 뉴딜’이어야 한다. 국민적 인내, 감흥, 동참을 유발하지 못하는 정부의 언약, 이게 두려움과 공허함의 주소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