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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브이세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0면

원지는 지금 카세트 라디오에서 치지직거리고 있는 테이프를 어떻게 처리하나 망설였다.자신과 영무의 야릇한 대화가 녹음되어 있는 것을 생각하면 얼른 버리고도 싶었지만,이우풍의 범죄를 입증하는 증거물로서의 가치가 충분한 테이프를 폐기처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원지는 일단 자신과 영무의 통화 내용을 지워놓기로 하였다.리와인드 버튼을 눌러 테이프를 다시 감고 플레이 버튼을 눌러 불량 아이들의 통화가 끝나기까지 기다려 레코드 버튼과 플레이 버튼을 동시에 눌렀다.그러면 뒷부분의 통화가 지워질 것이었다.

테이프가 다 돌아가자 원지는 리와인드 버튼을 눌러 지우고자 한 녹음 부분이 소거되었나 확인을 해보았다.자신과 영무의 통화 내용뿐 아니라 남편과의 통화내용도 지워져 있었다.그러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마치 원지 자신의 범죄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물이 소멸된 기분이기도 했다.한편으로 이 테이프를 언젠가는 아내의 불륜을 입증해줄 증거물로 여기며 몰래 보관하고 있었던 남편이 괘씸하기 이를 데 없었다.남편 구환이 바람을 피우고 있는 낌새를 느끼고 있는 원지로서는 그러한 감정이 더욱 파고들었다.

자기가 바람을 피우고 있으니까 아내도 바람을 피우는 게 아닌가 의처증이 생기는 거지 뭐. 이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원지는 이빨로 입술을 깨물며 두 주먹을 쥐었다.사실 영무와 원지의 관계는 남편이 의심을 할 만큼 심각하다고 할 수 있었다.원지는 어디까지나 영무에 대하여 거리를 두려고 하는 편이지만 영무는 원지를 만날 적마다 원지를 안아보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처럼 굴었다.원지는 영무가 그럴 적마다 슬쩍슬쩍 재치있게 피하고는 있지만,원지 자기를 매력 있는 여자로 여기며 안아보고 싶은 욕망을 품는 영무가 그렇게 싫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원지는 남편 구환과 이혼까지는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영무의 품에 안기리라는 예감은 늘 가지고 있었다.무엇보다 남편 구환이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이라도 된다면 원지 스스로 무슨 일을 저지를 지도 모를 일이었다.

원지는 그 테이프를 다시 구환의 수리함 도구틀 속에 넣어두고 도청 녹음기에서 꺼낸 테이프도 도로 제자리에 갖다두었다.말하자면 도청 녹음기가 계속해서 작동하도록 내버려둔 셈이었다.원지는 남편 구환이 바람을 피우고 있는 상대 여자를 확인하고 난 연후에,도청 녹음기 건에 관하여 구환에게 따져보리라 마음먹고 있었다.전화가 도청되고 있는 사실을 알았으니 꼬투리가 잡힐 통화는 하지 않으면 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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