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김정렴정치회고록>16. 박정희 대통령의 근검절약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최근 국민들 사이에 박정희(朴正熙)대통령에 대한 추모가 깊어지고 있다.나는 정말로 가슴 깊이 흐뭇함을 느낀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것은 우선 朴대통령이 자신을 위해 부(富)를 모으지 않았으며 근검.절약을 실천한 지도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민간인으로서 나만큼 헬리콥터를 많이 탄 사람은 없을 것이다.朴대통령이 달려갔던 그 많고 많은 현장확인과 현장지도의 길에 나는 항상 자동차나 헬기를 타고 수행했다.

헬기안에서 朴대통령은 여기저기 우뚝 솟은 아파트단지,아름다운 농촌주택,크고 작은 공장들과 대규모 다목적댐.방조제,그리고 간척지등을 내려다보았다.

朴대통령은 마치 자신의 아파트나 집.공장이 늘어나는 것처럼 기뻐했다.

朴대통령은 개인의 재산에는 하등 관심이 없고 오로지 나라의 경제와 살림살이가 잘 되는 것만 바랐고 또 그 성장을 기뻐했다.나는 朴대통령 집무실에 있던 파리채를 기억한다.

朴대통령이 살던 본관 2층과 집무하던 1층에는 에어컨이 없었다.전기를 아끼려는 뜻이었다.

선풍기는 있었지만 朴대통령은 그것조차 돌리지 않았다.한여름에 열기가 닥치면 朴대통령은 창문을 열었고 파리가 날아 들어오곤 했다.朴대통령은 파리채를 휘둘러 파리를 잡았다.

2층 서쪽 구석에 있는 내방은 오후 내내 뜨거운 햇볕으로 달구어졌다.땀이 많이 흘렀지만 대통령이 틀지 않는데 내가 선풍기를 돌릴 수는 없었다.

朴대통령은 아침.저녁으로 밥을 먹을 때 꼭 30%는 보리를 섞었다.지금처럼 건강식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쌀을 아끼려는 혼식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특별한 행사가 없으면 점심은 멸치나 고깃국물에 만 기계국수였다.

영부인 육영수(陸英修)여사와 나,의전수석.비서실장보좌관등 본관 식구들은 똑같이 국수를 먹었다.

장관들도 청와대에서 회의를 하는 날이면 점심은 국수였다.

차지철(車智澈)경호실장은 경호실장실에 자신의 전용식당을 만들었다.이 식당의 문을 열때 車실장은 朴대통령을 초청했고 나도 따라갔다.

그런데 점심메뉴로 스테이크가 나왔다.나는 속으로“대통령은 국수를 먹는데 경호실장이 왜 스테이크를 자르나”라는 생각으로 언짢았다.

후에도 車실장은 朴대통령을 몇번 더 모시면서 나를 같이 초청했다.

그러나 나는 다시는 가지 않았다.

朴대통령은 솔선해서 국산품을 애용했다.일상용품중 넥타이.만년필.전기면도기 세가지를 빼고는 양복.외투.내의.구두등 모든 것을 朴대통령은 국산품을 썼다.세가지 외제품 사용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넥타이는 매듭이 풀리지 않게 하는 납처리기술이 중요한데 우리나라가 이를 도입하려면 비싼 로열티를 주어야 했다.

그래서 朴대통령은 대사들이 귀국해서 외국산 넥타이 2~3개씩을 선물하면 이를 주로 맸다.

만년필도 국산 빠이롯트회사를 적극 지원했으나 외국의 일류품에 미치지 못했다.전기면도기도 독일 브라운사의 명제품처럼 만들어 보라고 했으나 국내기술로는 역부족이었다.국산이 멋있게 성공한 적도 있다.두산산업이'마주앙'이라는 상표로 백포도주와 적포도주를 생산해 냈을 때 朴대통령은 무척 기뻐했다.

하루는 포도주 생산국 출신으로 국내에 살고 있는 외국인 신부와 수녀를 청와대로 초청해 시음회를 가졌다.국산상표라는 것을 숨기고 외국산 일류 포도주와 비교해 보도록 한 것이다.

외국인들은“백마주앙은 세계 일류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으나 적마주앙은 좀 떨어진다”고 품평했다.그후 朴대통령은 국빈을 접대할 때 백포도주는 국산 마주앙을 썼다.

한식을 접대할 때는 적포도주 대신 경주법주를 애용했다.

저녁때 朴대통령이 특별보좌관단과 청와대식당에서 회식할 때 술은 주로 원당에서 가져온 막걸리였다.

朴대통령에게 막걸리는 술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농촌에서 자란 朴대통령은 막걸리가 단순한 술이 아니라 허기를 달래주는 음식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농촌을 잊지 못하는 朴대통령은 운명적으로 막걸리를 놓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朴대통령이 시해당한 궁정동 만찬장에는 시바스리걸이라는 양주가 있었다.그렇게 양주를 마시는 술자리는 청와대내에서는 별로 없었다.

그리고 시기적으로도 朴대통령의 마지막 나날인 79년에 들어서였던 것같다.91년 중앙일보에 연재됐던'청와대비서실'이라는 시리즈에서 나는 朴대통령의 전속이발사가 이렇게 증언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朴대통령,그 양반만 생각하면 참 가슴이 아픕니다.러닝셔츠를 입었는데 낡아 목부분이 해져있고 좀이 슨 것처럼 군데군데 작은 구멍이 있었어요.허리띠는 또 몇십년을 매었던지 두겹가죽이 떨어져 따로 놀고 있고 구멍은 늘어나 연필자루가 드나들 정도였다니까요.자기 욕심은 그렇게 없던 양반이….” 79년 10월26일 朴대통령이 흉탄에 서거한 다음날,본관 2층 朴대통령의 주거공간을 수색하던 보안사 수사팀은 朴대통령의 욕실 변기물통에서 벽돌 한장을 발견했다고 한다.

朴대통령이 아낀 수돗물은 양은 적지만 오랫동안 시냇물이 되어 국민의 가슴에 흐를 것이다.

朴대통령이 서거한후“부정축재한 재산을 빼돌렸다”“스위스은행에도 거액이 숨어있을 것”이라는 온갖 음해성 풍설이 돌았다.그가 죽은후 18년이라는 세월은 그런 소문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증명했다. 정리=김진 기자

◇이 회고록은 20회까지 연재될 예정입니다.지금까지 실린 회고록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의견을 환영합니다.팩스 02-751-5372.

<사진설명>

68년 1월 청와대본관 뒤뜰을 거닐고 있는 박정희대통령 일가.오른쪽부터 영부인 육영수여사,아들 지만군,둘째딸 근영양,朴대통령,맏딸 근혜양.朴대통령은 검소했으며 개인적인 욕심을 충족하기 위해 부를 축적한 것이 없다. [중앙포토]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