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눈>대통령후보 풍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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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대통령 하겠다는 사람들이 넘쳐난다.국민들 입장에서 반겨야 할지,개탄해야 할지 잘 분간이 안간다.'난세(亂世)에 영웅'이라더니 대통령 재목(材木)들이 한꺼번에 쏟아지기라도 했단 말인가.지금까지 우리는 그저 그런 대통령들밖에 뽑지 못했다.그 후보가 좋아서라기보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어 찍어준 경우가 더 많았다.

사흘이 멀다 하고 예비후보들의 출마선언이 꼬리를 무는 작금의 상황,'선택의 정치'는 바야흐로 이 땅에서 그 꽃을 활짝 피우려는가.불행하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체육관에서 손들어주기'식이 아닌 자유경선에서 후보의 난립은 극히 자연스런 현상이다.문제는 그 동기다.꼭 대통령이 되겠다는 차원이 아니고 다음 정권 창출과정에서 자신의 지분(持分)을 챙기기 위해 너도 나도 뛰어든다.'밑져야 본전'이라는 심리도 팽배하다고 한다.'아무나 장관이 되는'시대에서'아무나'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는 대통령 평가절하시대로 치닫는 느낌이다.

영국 옥스퍼드의 공법학자 제임스 브라이스경(卿)이 1888년에 쓴'위대한 사람은 왜 대통령에 뽑히지 못하는가'라는 글이 새삼 생각난다.그가 1870년 처음 미국을 방문했을 때 미국 대통령은 율리시스 그랜트였다.10년후 두번째 방문했을 때 대통령은 러더퍼드 헤이스였다.다시 3년후는 체스터 아서였다.그저 그런 대통령들이었다.브라이스경은 그 이유를 정당에서 찾았다.구태의연한 당조직과 그 고질적 문화 때문에 훌륭한 사람이 그 당의 대통령후보로 뽑히기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그는 판단했다.

지난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봅 도울은 처음부터 클린턴의 상대가 못됐다.그럼에도 공화당은 도울을 후보로 내세우며'지는 싸움'을 벌였다.당내 조직의 뿌리나 후원회를 통한 모금 능력에서 도울을 능가하는 후보는 없었기 때문이다.

경제학자이자 정치인으로 도울과 경선을 벌였던 필 그램 상원의원은 대통령 선출과정을'$=P'라는 등식으로 표현한다.대통령 당선은 곧 돈이다.공화당 후보지명을 얻어 클린턴과 싸워 이기는데 필요한 매직 넘버를 그는 4천4백70만달러(약 4백억원)로 잡았다.대통령선거는'미인선발대회'도,'경마'도 아닌'거대한 경매'라고 한다.대통령은 국민들이 뽑는 것이 아니라'돈을 주고 산다'는 비아냥도 쏟아진다.운동원을 고용하고,방송광고나 유인물을 통해 자신의 아이디어와 정책을 널리 알리는데 막대한 돈이 든다.

정치에서 돈은 필요악이다.대선자금의 규모보다'어떻게 모금해 어디 어디에 썼느냐'는 투명성이 돈정치의 알파요 오메가다.커넥션이 좋고 후원자를 많이 동원할 수 있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다.당내 프로정치꾼들,소위'정당동물'들 틈바구니에서 추대 또는 영입된'아마추어'들이 뿌리를 내리기는 정말 어렵다.

대통령선거운동 과정은 흔히'18-18'로 불린다.18개월동안 하루 18시간씩 뛴다.가정을 내팽개치고 정치에 반쯤 미쳤거나'대통령병 환자'들 아니면 엄두를 내지 못한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 가운데'위대한'대통령은 조지 워싱턴과 에이브러햄 링컨.프랭클린 루스벨트가 고작이다.당이나 지역구에 뿌리가 없는 사회의 지도급 인사들이 대통령후보가 되기도 어렵고,대통령으로 뽑히기는 더더욱 어려워지는 상황이다.

대통령후보의 느닷없는 풍년은 당 지도부의 장악력 쇠퇴란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도 적지 않다.후보들간의 소위 합종연횡으로 정치판을 새롭게 짜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그러나 안될 줄 뻔히 알면서도 지분 확보를 위해,또는'차차기'를 노려 미리 발을 들여놓는 중구난방식 출마선언은 대선정국의 혼란을 가중시키고 국민들의 올바른 선택을 흐리게 할 뿐이다.

대통령이 못났다고 욕하는 것은 누워 침뱉기다.대통령의 수준은 바로 그 나라 국민들의 수준이다.그러잖아도 제대로 된 대통령 뽑기가 어려운 마당에'아무나'나선다면 이는 대통령제와 대통령을 뽑는 전체 국민에 대한 모독이다. 변상근 편집국장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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