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올림픽 30年·태권도 40年] 96. 한국의 여성 스포츠(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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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67년 세계여자농구선수권 준우승을 차지하고 개선한 여자농구대표팀. 오른쪽에서 넷째가 박신자 선수.

쿠베르탱은 근대 올림픽 창시자로 추앙받고 있지만 여성 스포츠인들은 좋아하기 힘들다. ‘여자는 경기하지 말고 구경이나 하라’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1800년대 말이라는 시대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여성의 능력이나 역할을 너무 과소평가한 것임에 틀림없다.

올림픽만 보더라도 현재 남성 전용 종목은 거의 없다. 복싱 등 극히 일부 종목을 제외하면 대부분 남녀 세부종목으로 나눠져 있다. 배드민턴 혼합복식 등 혼성 종목도 있고, 승마는 남녀 구별없이 경쟁한다. 그 비중이 남자와 거의 똑같다. 우리나라도 학교 체육을 통해 여성 스포츠가 대중화되기 시작했으며 여자선수들은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종목별 세계선수권 등 국제대회에서 남자보다 더 좋은 성적을 올림으로써 국위선양의 기수가 됐다.

1970년대 GAISF 사무총장이며 세계역도연맹 사무총장이었던 오스카 스테이트는 한국의 스포츠에 대해 “여자가 남자보다 잘 하고, 몇 개 종목에 한정된 소수 정예주의다. 북한에는 꼭 이겨야 하며 일본에게는 덜 져야 한다. 올림픽 개최는 꿈도 못꾸고, 아시안게임이나 한 번 치렀으면 한다”고 했다. 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레슬링의 양정모 선수가 해방 후 첫 금메달을 땄으니 스테이트가 거의 정확히 분석했다고 본다.

검정치마를 입고 전국체전에 출전하던 여성 선수들은 큰 지원을 받지 못했음에도 한국여성 특유의 부지런함과 악착스러움을 바탕으로 일취월장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올림피안은 48년 런던올림픽 포환던지기에 출전한 박봉식(이화여대)선수였다. 아깝게 너무 일찍 타계하는 바람에 세간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67년 체코 프라하에서 열린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박신자 김추자 김명자가 주축이 된 한국여자대표팀은 신장의 열세를 극복하고 은메달의 영광을 차지했다. 당시 유엔대표부에서 근무하던 나는 이들 일행이 귀국길에 뉴욕에 들렀을 때 삼복정이란 한국음식점에서 한식을 대접할 기회가 있었다. 1년 뒤 박신자는 청와대의 지원을 받아 미국 매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의 체육대학에 유학했다. 박종규 경호실장 집에서 송별회를 하는 등 지금의 박태환, 김연아에 버금가는 대접이었다.

73년 사라예보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는 정현숙 이에리사 박미자가 금메달을 목에 걸면서 구기 사상 최초로 세계정상에 올랐다. 서울시내에서 카퍼레이드를 하면서 열광했던 장면이 생생하다.

72년 뮌헨올림픽에서 아깝게 4위에 그쳤던 여자배구팀은 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드디어 동메달을 땄다. 남녀 통털어 한국의 구기종목 첫 올림픽 메달이었다. 준결승에서 당시 세계최강인 일본에는 졌지만 동독, 폴란드, 쿠바를 상대로 잇따라 역전승을 거뒀던 감격이 새롭다. 여자배구는 한 경기도 빼놓지 않고 경기장을 찾아 응원을 했었다. 조혜정, 유경화, 유정혜,변경자 등이 맹활약했는데 유경화는 내가 결혼 주례를 하는 기쁨도 가졌다.

김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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