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對北 식량지원 - 이상과 현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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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북한의 기근 때문에 남북한 모두 국제사회에서 요즘 망신을 당하고 있다.지난주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21세기위원회 제4차회의에 참석하고 느낀 소감이다.전 인민이 굶주림에 허덕이는데도 막대한 비용을 들여 군사 퍼레이드나 벌이는 북한이나,같은 민족으로서 이러한 기근 해결에 1차적 책임이 있는데도 냉담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이 서로 비슷하다는 시각이 자리잡아가고 있다.

일전에 북한을 방문했던 토니 홀 미 하원의원은“기아의 최우선 희생자는 당 일꾼.군인들이 아니라 그 사회에서 가장 힘이 없는 어린이.노약자.임산부등”이라며“4자회담이,3자접촉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이들이 이런 정치 때문에 희생되는 것을 계속 보고만 있을 것인가”라는 논지의 연설을 했다.역시 북한을 방문했던 하와이 출신 이노우에 상원의원도 북한의 비참한 실정과 비정상적 행동을 소개한뒤 이러한 북한에 대해“그렇게 당하는 것이 싸다”는 식의 남한쪽 반응 역시 점잖지 않은 대응이라고 평가했다.

사실 우리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말들이다.총부리는 남한을 향해 그대로 겨냥한채 식량은 도와달라는 것도 문제려니와 이번 베이징(北京)적십자 접촉이 실패한 것처럼 어떻게 도와야 할지 논의해보자는 것조차 거부하는 마당에 남한이 소극적이라고 비난하니 답답한 노릇이다.

북한 식량지원 문제에서 국제사회와 우리의 시각에 이러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이상과 현실의 갈등이다.미 의회나 언론은 북한정권의 비상식적 행동은 그렇다 치더라도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북한 주민을 우선 살려놓고 보자는 다분히 휴머니즘적 시각을 갖고 접근하고 있다.반면 북한으로부터 군사위협을 당하고 있는 우리는 이러한 지원이 긴장완화에 도움을 주든가,최소한 북의 군사력을 유지 또는 증강시켜서는 안된다는 현실적 판단을 하지 않을 수 없다.집안에 망종 하나가 매일 칼부림 행패를 하는데 이웃사람들은 그 동생이 굶는데 도와주지 않는다고 입방아만 찧는 격이다.

북한은 현재 부족한 식량이 대략 2백50만으로 이중 1백만은 중국의 원조등을 통해 자체해결하겠으니 1백50만은 한.미등이 도와달라는 것이다.1백50만이라는 물량은 쌀의 경우 국제시세로만도 7억5천만달러 상당에 이른다.1백만 군대에 하루 8백50씩 충분히 식량을 줄 경우 1년치 군량미가 30만 정도니 북한이 원하는 양은 5년치 군량미에 해당한다.지금 우리민족 서로돕기 운동본부에서 잡은 목표가 옥수수 10만이고,국제기구가 모금하고 있는 액수도 고작 수천만달러 수준인 점으로 볼 때 결국 정부차원의 개입 없이는 이런 대규모 지원은 불가능하다.

미국은 이러한 대규모 지원은 결국 한국정부에 떠맡길 수밖에 없다는 판단인데 우리로서는 당연히 북한의 군사적 위협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다.그렇기 때문에 그만한 지원을 받으려면 긴장완화나 남북대화등에 성의를 가지라는 것인데 북한은 쌀만 내놓으라 하고,국제사회는 우리가 도와주지 않는다고 비판만 한다.

다행히 한.미 행정부간에 북한지원을 둘러싼 갈등은 아직 표출되지 않고 있는 분위기였다.미 행정부는 한국정부의 이러한 현실주의적 판단을 수긍하고 있었다.문제는 인도주의를 내세워 다분히 이상주의적 접근을 시도하는 미 의회와 언론의 압력에 미 행정부가 앞으로 어떤 영향을 받을까 하는 점이다.인권외교등에서 보듯 의회와 여론은 이상주의적 경향을 추구하며 행정부의 외교정책에 결정적 영향력을 미쳐 왔다.그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대외적으로 냉혹한 나라라는 오해만 받고 결국 압력에 못이겨 돈까지 부담할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대(對)북한 식량외교에서 우리가 초동(初動)대응때 인도주의적 측면을 너무 소홀히 했던 점을 반성해야 한다.지금이라도 현실주의적 판단은 유지하더라도 인도주의적 접근에 보다 적극적 자세를 가져야 한다.이는 미 의회나 여론의 압력에 대응하자는 차원을 넘어 순수한 의미에서도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민간차원의 지원이 보다 활성화되도록 배려해야 하고 국제기구를 통한 지원도 우리가 다른나라보다 앞에 나서 주도한다는 인상을 심어줄 필요가 있다.

그러한 휴머니즘을 보이면서 정부차원의 지원은 북한의 변화를 보아가며 결정한다는 원칙을 고수해야 한다.그런데도 압력이 들어온다면 미 의회가 북한에 PL480 무상원조를 주든가,중유(重油)지원금을 곡물로 바꾸어 주든가 마음대로 하라고 배짱을 내밀어도 명분이 설 수 있는 것이다.

(문창극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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