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칼럼>행동하는 株主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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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한보사건의 진짜 피해자는 누구일까.우선 한보그룹 또는 관련 중소기업들의 종업원을 들 수 있다.최근 부도위기에 몰린 진로그룹도 한보 때문에 날벼락을 맞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안 받았다”에서“측근이 받았다”로 말을 바꾼 정치인들도 피해자라고 우길지 모른다.

그러나 진짜 피해자는 따로 있다.한보철강과 상아제약,그리고 한보의 위장계열사로 지목됐던 세양선박등 한보계열사들과 한보에 대출해준 은행.증권.종금의 소수주주가 바로 그들이다.한보철강의 경우 부도 당시 52개 기관과 1만여명의 개인투자자들이 1천7백만주를 보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한보철강의 주가는 부도 직전 5천7백원대에서 2월 한때 2천3백원까지 떨어졌다.또 당시 1만2천원에 거래되던 상아제약은 아직 반토막난 채로,1만원을 호가하던 세양선박은 겨우 3천7백원에 거래되고 있다.한보에 자본금보다 더 많은 돈을 대출해준 제일은행의 주가도 한때 3천원을 밑돌았다.주주들의 재산이 연기처럼 사라진 것이다.

사실이 이러한데도 이들이 세간의 주목을 받지 못한 이유는'투자 판단은 자기책임'이기 때문이다.더구나 상당수의 투자자들이 단기매매를 일삼다 보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발생해도 동정을 받지 못한다.게다가 오늘날 소수주주가 기댈 곳은 한군데도 없다.

흔히 주인으로 치는 오너경영자는 대부분 전체 주주의 부에 관심이 별로 없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은행처럼 오너경영자가 없는 경우엔 주인의 충실한 대리인이어야 할 임원들이 본분을 망각한지 오래다.흔히 은행에 주인이 없기 때문에 주인을 찾아주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이것처럼 황당한 말이 없다.주주는 주인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이번 한보사건에서도 드러났듯이 주인은 있으되 주인 아닌 개인.기관.정부가 주인 행세를 했을 뿐이다.그렇다고 공인회계사나 신용평가전문기관도 믿음직스럽지 못하고 전망이 어두운 기업을 매도하라고 딱 부러지게 권하는 증권사도 없다.

이렇게 된 이유는 결국 주주가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는 노력을 게을리했기 때문이다.특히 기관투자가들은'선량한 관리자'로서의 역할을 되새겨볼 때다.투자한 기업의 경영이 잘 돼가는지 검토하고 필요하면 경영진을 교체하는등 적극적인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시세차익이나 노리는 좁은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얘기다.선진시장에서는 기관투자가의 기업경영 참여가 과연 바람직한지를 놓고 토론할 정도로 이들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요컨대 투자자들이'행동하는 주주'로 거듭난다면 이 또한 시장의 비효율을 제거하는데 한 몫을 할 것이다. 권성철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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