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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성은 삶의 본질, 확 벌거벗고 두려움과 맞서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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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호 06면

인터넷의 바다엔 호기심을 자극하는 무수한 언론 매체가 오늘도 창간과 폐간을 거듭한다. 지금에야 이렇듯 흔해졌지만, 그건 누군가가 달걀의 모서리를 깨고 탁자에 바로 세운 ‘콜럼버스’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인터넷 논객이 논객의 자리에 자족하고 있을 때 김어준(41) ‘딴지일보’ 총수가 없었다면 우리나라 인터넷 미디어의 역사는 1998년부터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장정일이 만난 작가-칼럼니스트 김어준

한때 40여 명의 직원을 거느렸던 사실이나,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 매체 순위에 인터넷 미디어로는 최초로 20위 안에 선정됐던 일, 그리고 모 기업이 천문학적 금액을 제시하며 인수를 제의했으나 거절했다는 뉴스는 김어준의 후광이다. 하지만 그를 이 지면에 초대한 것은 ‘딴지일보’ 때문이 아니다. 조금 엉뚱하게도 그는 지난해 말 전국의 청춘남녀들이 보낸 고민에 세세히 답한 인생상담집을 펴냈다. 제목도 씩씩한『건투를 빈다』(푸른숲, 2008)가 그것이다.

“평소 인생상담란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상담 의뢰자들을 불완전한 영혼으로 취급하며 ‘좋은 게 좋은 거고 다 잘될 거야’라고 위로하는 건 거짓말이기도 하거니와 무례한 거라 여겼죠. 제 상담 원칙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도덕적·윤리적으로 재단하지 말 것. 둘째, 사람들의 자기정화 능력과 자기치유 능력을 믿을 것. 상담의 가장 흔한 잣대가 도덕이나 윤리인데 그건 상담자 자신에게 도덕적 우위를 선사한다는 거 외에는 아무런 효용도 없죠. 사람들을 믿지 않는 건 오만한 거고요. 야박하고 잔인하게 비칠 수도 있겠으나 의뢰자가 피하고자 하는 것 그대로를 드러내 스스로 감당케 하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죠.”

김어준은 모르지만 필자는 그에게 얼마간의 빚이 있다. 어쩌다 대학교 1학년생을 대상으로 글쓰기 수업을 하게 됐을 때 모 신문에 연재되던 그의 인생상담란은 그야말로 안성맞춤인 수업 교재였다. 가장 흥미로운 상담기를 선별해 수강생의 숫자만큼 복사해 나누어 준 다음, 첫째, 의뢰자의 사연을 단 세 문장으로 요약하고, 둘째, 상담자의 조언을 3분의 1로 요약한 뒤, 셋째, 학생 자신만의 해결책을 원고지 8장 분량으로 써보라고 시킨 것이다.

이런 수업은 대학입시를 위해 반복했던 입시논술과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문학의 특질인 상상력이 어떻게 갈등하고 보완하는가에 대해 쓰는 것과,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며느리는 절대 들이지 않겠다는 어머니와 교회에 다닐 생각이 도통 없는 여자친구 사이에 낀 고민남에 대해 쓰는 것은 퍽 다르다.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와 맹자의 성선설이 가진 인간관을 비교해 보고 자신의 의견을 쓰는 것과, 어쩌다 친한 친구의 오빠와 사랑에 빠졌는데 나의 과거를 다 알고 있는 친구가 극렬히 방해하니 어쩌면 좋겠느냐는 고민녀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쓰는 일 역시 그렇다.

지근한 글쓰기란 내가 당면해 있거나 미구에 닥치게 될 문제, 혹은 주위의 누군가가 겪고 있거나 나 또한 피해갈 수 없는 구체적이고 절실한 것에 대해 생각을 가다듬는 일이다. 그러니 격주마다 저작권료 없이 활용한 김어준의 인생상담이 학생들의 글쓰기 수업을 후끈하게 만든 것은 자연스럽다. 자신들 이야기였던 것이다.

“몇 년간 투고된 사연을 일삼아 읽은 덕에 대한민국 사적 고민 일반에 대한 대략의 공통분모를 알게 되었습니다. 첫째,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 불확실성은 삶의 본질인데, 그게 완전히 없어지길 원합니다. 두려움에 맞서는 방식이야말로 그 사람을 결정하는 건데, 두려움 자체를 문제 삼으니 늘 징징거리게 되죠. 둘째, 자신이 언제 행복한지 스스로도 모른다는 거.

예를 들어 누구와 만나고 누구와 헤어져야 하느냐 따위의 질문들은 결국 삶에서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게 무엇인지, 그 행복을 얻기 위한 대가로 어디까지 지불할 각오가 돼 있는지에 달린 거죠. 그러니까 그런 고민은 결국 자신밖에 답할 수가 없게 되어 있는데도, 그 본원적 질문은 건너뛰고 그저 남들은 뭘 선택했는지만 궁금해합니다. 셋째, 자신이 너무 중요하다. 물론 다들 자신이 중요하지만, 좌절과 분노의 내막을 듣고 보면 누구나가 겪는 것들입니다. 이기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객관화가 안 됐기 때문에 자기 고통만 유별나게 여기는 거죠.”

남녀노소 상관없다. 방금 말한 세 가지 청진기로 본인의 문제를 검진해 보라. 이 글을 쓰는 필자도 해봤다. 그 결과 첫째와 셋째 문제는 극복했거나 졸업했다고 판단된다. 삶의 항구적인 불확실성에 대해 나름으로 즐기고 있고, 자기객관화 능력까지는 모르더라도 나는 내가 범인이라는 것을 안다.

그런데 둘째는 잘 모르겠다. 내가 무엇을 행복이라고 여기는지…. 김어준은 바로 이런 경우가 “우리 사회가 성인 육성에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내가 언제 행복한지 알고 담담하게 삶의 불확실성과 스스로 맞서는 순간 아이는 어른이 되는데, 우리 사회는 ‘어른이 되지 못한 아이’가 너무 많단다.

『건투를 빈다』는 문어체를 수련한 나 같은 사람을 단번에 폐인으로 만드는 김어준만의 구어체가 중독성을 뿜어낸다. 조사와 어미가 많이 깎여 나간 데다 은어·속어·비어가 간간이 버무려진 그의 문체를 남성 호르몬이 물씬한 ‘마초체’라고 명명하고 싶어진다. 그것과 함께 그 흔한 이론이나 인용이 말끔히 가셔져 있는 것도 이 책의 특징이다.

“원래 직접 겪어서 그 속에서 나름의 원리를 몸으로 체득하기 전에는 책에 뭐라고 쓰여 있든 관심을 안 둔다”는 그는 “먼저 경험하고, 생각한 다음, 그게 좀 부족하다 싶으면 그때서야 책을 찾아 읽는 철저한 경험주의자”다. 그래서 자기 생각은 없이 “누가 뭐라고 했다는 식의 멘트가 많은 책이 싫다”고 한다. 독자들은 이 책에서 그걸 실감하게 된다.

“저는 본능주의자입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생겨먹은 대로 사는 게 장땡이란 아주 간단한 주의죠. 여기서 중요한 건 자신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먼저 알아야 한다는 거. 그런 다음 불완전한 상태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면서, 그 경향성대로의 자기를 세상에 구현한다는 게 골자입니다. 해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자는 본능주의자라 할 수 없죠. 막 사는 거하고는 다른 거니까. 장형이 제 문체와 조언 속에서 느꼈다는 ‘힘’은 자존감에서 나온 겁니다. 그게 없으면 뭘 해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장 작가’란 줄임말로 불리는 장정일씨는 시인·소설가·희곡작가·책 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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