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아시아가벌>16. 수카르노家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인민의 정신은 결코 죽일 수 없다.”

지난 45년 네덜란드로부터 독립을 얻어내 인도네시아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고(故)수카르노 대통령은 독립선언 당시 이렇게 말했다.

어떤 독재나 식민 정치도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잠재울 수는 결코 없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의 말대로 지난 80년대 중반부터 인도네시아에는 수카르노의 초상화를 앞에 걸고 민주화를 외치는 반정부 세력이 확산되기 시작했다.지난 68년부터 장기 집권하고 있는 수하르토 현 대통령의 독재 체제에 반항하는 세력이었다.

되살아난 수카르노 바람의 선봉에 서 있는 사람은 바로 그의 딸인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다.

메가와티는 수카르노 열풍이 일던 지난 87년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이후 93년 메가와티는 젊은 지식인등 수카르노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인도네시아민주당(PDI)의 당수로 추대됐다.

이 PDI에는 메가와티의 남편인 다우세키에마스 모하마드와 남동생인 구루 수카르노푸트리도 현역 의원으로 참여해 집안 전체가 반정부 투쟁에 나서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메가와티 집안의 반(反)수하르토 투쟁은 힘겹기만 하다.30년간 유지돼온 수하르토의 통치 기반이 이제는 워낙 공고하게 굳어버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메가와티는 지난해 6월 PDI당수직을 박탈당하는 비운을 겪었다.PDI내 메가와티의 경쟁자인 수루야디를 정부가 부추겨 당수로 앉히고 메가와티를 강제로 자리에서 물러나도록 했다.

올해 총선과 내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수카르노의 망령이 되살아나면서 메가와티에 대한 지지가 확산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메가와티 지지자들은 격렬한 반정부 시위를 벌였으나 그 힘은 너무나 미미했다.

메가와티 집안 입장에서 볼때 현 수하르토 대통령은 그야말로 철천지 원수라고 할 수 있다.메가와티의 아버지인 수카르노 대통령도 수하르토에 의해 정권을 빼앗기고 불명예속에서 사망했기 때문이다.

수카르노는 독립이후 유엔을 탈퇴하고 제3세계 국가들을 중심으로 신흥국가회의를 제창하는등 반외세(反外勢)를 주창한 민족주의자였다.그는 또 독립후 20년간 우익 군부와 공산당 세력을 견제하는 중립 노선을 취하면서 다소 좌경화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65년 9월30일 인도네시아의 운명을 뒤바꿔놓은 사건이 발생했다.

일부 소장파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군 장성 6명을 살해하고 정부 전복을 기도한 것. 수하르토는 이 쿠데타를 진압해 정권을 잡았고 공산세력을 괴멸시켰다.결국 66년2월 수하르토는 수카르노 대통령이 이 공산주의자들의 쿠데타에 관련됐다는 혐의를 씌워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이후 수카르노는 가택 연금중 70년 사망했다.

최근 수카르노 추종자들은 그가 67년 의사당에서 쿠데타 사건에 대해 마지막으로 행한 연설에 대해 진상규명 세미나를 여는등 수카르노의 명예 회복을 위해 노력중이다.

80년대 들어 통치체제 구축에 자신감을 얻은 수하르토 대통령은 85년 교과서를 개정,수카르노를 인도네시아 독립을 일궈낸 민족의 영웅으로 기술함으로써 그의 명예를 일부 되살려 주었다.또 수하르토 정부는 94년 수카르노의 첫번째 부인이자 메가와티의 생모인 고 파트마와티 여사에게 독립 투쟁에 공헌했다는 이유로 공로 훈장을 수여하는등 한편으로는 수카르노 집안 달래기에 나서고 있다.

파트마와티 여사는 생전에 일부다처제 폐지등 여성 해방 운동에 나선 강한 성격의 소유자로 80년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에서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오는 5월29일 총선을 치르는 인도네시아의 앞날은 수하르토에게 대항하는 수카르노 집안의 투쟁 강도에 큰 영향을 받을 것이다.그러나 수하르토 정부는 이번 총선에서 메가와티의 선거 출마를 원천 봉쇄하기 위해 최근 발표한 2천7백여명의

입후보 명단에서 아예 제외시켰다.조용하지만 인내심이 많고 겉인상은 부드럽지만 끝장을 보는 성격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메가와티가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어떻게 수하르토 독재에 맞서나갈지 지켜볼 일이다. 〈김형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