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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 대표 청와대 토론회] '대화의 틀' 5년 만에 복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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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 노무현 대통령이 31일 청와대에서 열린 노사관계 토론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최정동 기자]

31일 노무현 대통령 주재로 열린 노사관계 토론회는 3시간10분 동안 진행됐다. 노 대통령이 국정 2기를 맞아 노사 정책을 어떻게 이끌 것인지를 예고해 준 자리였다. 키워드는 '대화와 타협'이었다.

노 대통령은 "경제 회생이나 양질의 일자리 창출 등은 모두 노사 간 대화와 타협의 문화가 정착될 때 가능하다"며 대화 복원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또 "노사 어느 한쪽의 의견을 듣기 어렵고 양쪽 다 무시할 수도 없지만 결론은 내야 한다"며 "노사정이 대화를 통해 양보하고 타협하면서 모두에게 불만스러울 수 있긴 하나 합의를 이끌어 내거나, 정부가 판단을 내려 밀고 가는 방법이 있는데 결국 합의를 잘하는 쪽이 경제에 긍정적"이라고 독려했다.

노사정은 이에 호응하듯 '노사정 지도자 회의'를 한시적으로 운영하기로 합의하고 첫 회의를 오는 4일 열기로 했다. 1999년 민주노총의 노사정위원회 탈퇴 이후 정지되다시피 했던 대화의 틀이 일단 복원된 것이다. 이 회의는 노동계의 제안을 받아 정부가 재계와 사전 조율을 거쳐 합의에 이르게 됐다고 이원덕 청와대 사회정책수석이 전했다.

이 수석은 이어 "경제 활성화와 지속가능한 성장 및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해 노사정이 머리를 맞대고 대화와 타협을 진행하기로 했다"며 "노사정 지도자 회의는 앞으로 석달 정도 운영될 것"이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이에 대해 "노사 대표가 큰 선물을 줘 감사하다"며 "노사 관계의 앞날에 희망을 갖게 된 만큼 우리 경제도 한 단계 더 높은 단계로 발전해 나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격려했다. 노사정 지도자 회의의 의제에는 제한이 없으나 일차적으로 노사정위원회 개편 방안과 노사관계 법제도를 선진화하는 작업의 일정과 방향이 논의될 것이라고 한다.

노 대통령은 또 "기업 쪽에서도 중소기업이 어렵고 노동계 쪽에서도 중소기업 비정규직이 어려운 만큼 5자 대화 정도 수준으로 가는 게 현실적이지 않으냐"며 노사정 대화의 틀을 확대할 것을 제안했다. 대기업 노조와 대기업이 주축이 된 노사관계 논의의 틀에 사회적 약자(弱者)를 포함시키자는 취지다.

노 대통령은 토론회에서 "정책 추진 과정에서 중소기업 문제와 중소기업 근로자들의 근무 조건에 대해 따뜻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는 점을 수차례 언급했다고 한다.

노 대통령은 이와 함께 "대화와 타협을 강조한다고 해서 법과 원칙을 소홀히 하겠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대화와 타협, 법과 원칙은 수레의 양 바퀴와 같아서 균형이 맞지 않으면 문제가 생기는 만큼 노든 사든 똑같은 잣대로 공정하게 원칙을 적용하겠다"고 했다.

정부가 원칙을 지킨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며 중재자로 나서야 노사 양측이 자신들만의 주장을 고집하지 않고 대화와 타협을 통해 절충점을 찾게 된다는 뜻이라고 청와대 관계자는 설명했다. "참여정부의 노동정책은 신자유주의 정책도 아니고, 친 노동자 정책도 아니다"는 노 대통령의 발언도 같은 맥락이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노동계와 재계가 현안과 관련해 상반된 입장을 보여 대타협에 이르기까지 많은 난관이 있을 것임을 예고했다.

박용성 대한상의 회장은 토론회에 앞서 노조가 제안한 사회공헌기금에 대해 "돈을 많이 버는 기업이 사회를 위해 쓸지는 기업이 정하는 것인 만큼 노사 간 협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이수영 경총 회장도 "임단협에서 일방적으로 제기했고, 경총에서 성명서까지 냈는데 국민적 합의 없이 판단해선 안 된다"고 경계했다. 반면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은 "정부가 해결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기업이 나서야 한다"고 반박했다. 실제 토론회에서는 비정규직 문제나 산별 교섭 등 구체적인 문제는 대화 채널을 정상화한 뒤에 논의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데 공감대가 형성돼 집중적인 토론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이원덕 수석이 전했다.

대신 이수호 민주노총 위원장은 "노사정 간 대화와 합의를 위한 노력에 적극 참여하겠다"며 "정부도 합의사항을 성실히 이행하고 노사 정책을 개선하는 데 노력해 달라"고 주문했다. 이수영 회장은 "재계도 투명경영을 적극적으로 진전시켜 나가겠다"며 "투명경영상을 제정하고 선정 과정에 양대 노총의 참여를 요청하겠다"고 했다.

박용성 회장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선 대기업 노동자의 임금인상 자제와 양보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냈다. 김용구 중소기협중앙회장은 "중소기업 경영과 근로자의 근무조건 향상을 위해선 대기업 노사 모두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다만 이용득 위원장은 "효과적인 노사정 협의를 위해선 산별교섭 체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김성탁 기자<sunty@joongang.co.kr>
사진=최정동 기자 <choijd@joongang.co.kr>

*** 노동계 입장 "비정규직도 같은 임금을"

노동계가 전력을 집중하고 있는 이슈는 비정규직의 차별 해소와 주5일근무제의 전면 실시다.

노동계는 비정규직 차별 해소를 위해 정부가 전향적인 자세로 적극 나서 재계를 설득하고 압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또 비정규직의 차별 철폐는 '같은 일을 하면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가리지 말고 같은 임금을 받아야 한다(동일노동.동일임금)'는 것이다. 그러면서 고용의 안정도 보장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사실상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시켜 달라는 얘기다.

하지만 비정규직 차별 문제는 정규직의 양보없이는 안 된다는 것이 정부와 재계의 일관된 입장이다. 일반적인 여론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날 토론회에서 "금융노조 차원에서 정규직 임금을 동결하고 이를 통해 고용을 늘리면서 비정규직 문제를 개선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의 발언도 이 같은 분위기를 의식한 것으로 분석된다. 이 위원장은 금융노조위원장을 겸하고 있다.

주5일근무제는 근로기준법상 기업 규모에 따라 연차적으로 실시토록 돼 있다. 하지만 노동계는 올해 안에 전면 실시를 요구하고 있다. 이를 통해 최근 이슈가 된 일자리를 나눌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에 휴무일에 차이를 두는 것은 또 다른 차별이라는 논리도 내세우고 있다.

한편 당초 거론할 것으로 알려졌던 사회공헌기금 문제에 대한 언급은 이날 없었다.

김기찬 기자<wolsu@joongang.co.kr>

*** 재계 입장 "정규직 과보호부터 해소를"

노사 현안에 대한 재계의 입장은 확고하다. 재계는 비정규직 처우 개선에 앞서 정규직에 대한 과보호 해소가 우선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정규직에 대한 구조조정이 힘든 상황에서 기업들이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것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에는 엄연히 생산성 차이가 있으므로 임금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하다는 '원칙론'도 내세우고 있다.

7월 1일부터 근로자 1000명 이상 사업장에서 시행되는 주5일 근무제에 대해서도 재계는 개정 근로기준법의 취지에 맞게 연월차휴가 축소 등 근로조건의 변경이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휴가 일수를 줄이지 않고 주5일 근무제를 시행할 경우 연간 휴일수가 143~173일로 세계 최고 수준이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완성차 4사 노조 등이 주장한 사회공헌기금에 대해서도 노사협상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공론화는 가능하지만 사회공헌기금 조성을 기업에 강제하는 것은 주주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자본주의 기업 정신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노조의 경영참여에 대해서도 재계는 경영권의 본질에 대한 침해라는 부정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재계는 노조의 인사.경영권 참여보다 성과배분제나 우리사주제 등을 통한 '이익참가'형태가 더 바람직하다고 보고 있다.

이현상 기자<leehs@joongang.co.kr>

[뉴스분석] 3차회의 때도 지지부진했는데 5자땐 더 험난

노무현 대통령은 노사 간의 대화와 타협이 좀처럼 이뤄지지 않고 있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5자 회의를 제안했다. 가급적 많은 당사자를 참여시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보자는 취지로 풀이된다.

하지만 얼마나 실효가 있을지 의문이다. 쟁점이 타결될 경우 당사자를 승복시키기가 쉽겠지만 합의를 이끌어내기가 훨씬 어려워질 수 있다는 얘기다.

전경련 관계자는 "기존의 노사정 3자 모임에서도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데 중소기업과 비정규직이 더해 5자가 되면 타협이 더욱 힘들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경총 관계자도 "3자냐 5자냐가 중요한 것 같지는 않다"며 "현행 노사정위에서도 이미 중소기업과 비정규직 문제는 경총과 한국노총에서 각각 대변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경총 회원사 중 절반이 중소기업이고 노사정위 상무위원회에는 중소기협중앙회장이 참여, 중기 입장을 반영해 왔다. 한국노총도 지난 2월 노사정위에서 '일자리 만들기 사회협약'을 체결하면서 비정규직 차별 해소를 조건으로 내건 바 있다.

요컨대 노사정위에서도 중기와 비정규직 문제가 논의되고 있는 만큼 이들을 대화 당사자로 추가시키는 게 큰 의미가 없다는 주장이다.

개편 논의가 일고 있는 노사정위도 1998년 1월 출범 당시엔 민주노총까지 참여해 반듯한 틀을 갖췄었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외환위기 이후 정부의 노동정책과 구조조정 방침에 민주노총이 반발하며 99년 2월 탈퇴한 것이다. 이후 노사정위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하더라도 민주노총의 불참으로 빛이 바랬다. 대화는 노사 당사자에게 맡기고 정부는 중심을 잡고 제한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결국 대통령의 5자 회의 발언은 앞으로 개편될 노사정위는 이해당사자가 폭넓게 참여, 지금보다 합의의 구속력이 커져야 한다는 큰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풀이된다. 문제는 대화의 틀이 아니라 상대방을 이해하고 얼마나 타협할 자세가 돼 있느냐다. 선진노사 관행의 정착이 시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철근 기자<jcom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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