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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마음속의문화유산>달동네와 골목길 - 허난설헌 무덤 - 여성國劇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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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전통문화 찾기 붐의 뒤안에는 두가지 동기가 작용한다.하나는 급속하고 파행적인 근대화 과정에서 잃어버렸던'자기'를 발견하려는 것이고,다른 하나는 자본주의화가 전지구적 시장을 휩쓸고 있는 시대에 고부가가치를 지닌 문화상품을 개발해야

한다는 경제적 측면에서다.

그러면 무수한 옛것들중 지금 시대상황에 필요한 것들을 취사선택해야 하는데 그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가.나는 1차적으로 미래지향성에 둔다.무작정 좋아보여서가 아니라 우리가 보다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필요하기에 지정한다는 것이다.

지금 문화유산에 대한 개념은 상당히 정태적이고 과거보존식으로 나아가고 있다.또한'영화로운' 과거를 상기시키는 유물이 중심이라 자연 지배층으로 기울고 있다.게다가 시기적으로도 근대 이전의 것이어야 하고 민족의 우수성을 과시할 수 있

는 것이어야 한다는 식으로 이해되고 있다.이런 통념은 사실상 남성중심적 민족주의와 복고주의적 성향을 띤 이들의 생각이다.

내가 여기서 살려야 할 문화유산으로 달동네와 골목길,허난설헌의 무덤,여성국극(國劇)이라는 특이한 항목들을 든 것은 바로 문화유산에 대한 기존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싶어서다.

나는 문화유산을 근대 이전에 국한시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서구사회에서 위대한 문화유산으로 불리는 것들도 실은 근대화 과정에서 재창출됐다는 점은 학계에서 이미 10여년전부터 지적됐고 또 공인됐다.우리사회 역시 2세기 가량의 근대

화 과정을 거쳐왔으며,이 과정에서 전통의 개념도 끊임없이 새롭게 재규정돼 왔다.내가 달동네를 부각시키는 이유는 문화유산을 근대 이전으로,또한 민족의 자부심을 외부에 과시하려는 어떤 것으로 한정하려는 통념을 깨기 위해서다.

식민지적 근대화를 해야 했던 우리 민족은 오랫동안 고달프고 가난했다.이를 잊기 위해 위대한 문화유산을 강조하는 것이 감정적 만족을 준다면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다.그러나 베르사유 궁전과 경복궁을 아무리 비교해도 안타까움은 남을

것이다.

나는'큰 것'과'위대한 것'을 숭상하는 경향이 자기소외를 증폭시켜온

식민지적 근대사에 주목하면서 우리의 가난했던 삶 그 자체를 받아들일 것을

권한다.일제시대 이후 어려운 시대를 살아온 우리 선조들의 지혜는 이른바

판잣집에,그리고

꼬불꼬불한 골목길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산꼭대기에 겹겹이 지은 집과 골목길,그리고 두어평 남짓한 공간에 온갖

살림살이를 다 갖추고 안채와 사랑채와 침실과 식당의 구분까지 하고 사는

공간활용의 미학과 정치학은 우리에게 매우 소중한 문화유산인 것이다.

아직 남아 있는 달동네는 몇 군데 없겠지만 늦지 않았다.봉천동 같은

산동네나 종로와 광화문 뒷골목,교동과 계동의 골목등은 늦기 전에

문화유산화해야 하는 곳들이다.

이곳은 아마도 외국인들이 보고 싶어하는 인기 관광지가 되기도 할

것이다.이제 가난한 제3세계를 여행하며 자국 화폐의 위력을 느끼고

싶어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그보다'콘크리트'도시에서 도저히 느낄 수

없는'인간'을 느끼고 싶어

여행을 떠난다.

사람들의 손때가 묻어있는 방,동네사람들의 싸움과 화해의 흔적,그리고

실제로 사람은 얼마나 적은 것을 소유하고도 즐겁게 살 수 있는 존재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공간.달동네와 골목길은 이런 이유로 우리가 보존해야 할

훌륭한 문화유산이다

.이'몹시 인간적인'삶의 공간은 머지않아 용인민속촌 못지 않게 후대들이

줄을 이어 방문할 곳이라고 나는 자신한다.

두번째로 나는 허난설헌의 생가 마을과 무덤을 꼽는다.단지 옛 것이라고 해

모든 것이 살려낼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나는 여성이라는 인구 절반의

희생을 바탕으로 지탱되는 가부장적 전통은 살려내선 안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근대는 신분

제와 불합리한 차별을 철폐하면서 생긴 문명이고,근본적으로 정의와 평등과

자유를 향한 열정을 바탕으로 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우리 전통 속에 숨쉬는 여성주의자의 흔적에

주목한다.남동생 허균과 함께 역사를 이야기하고 신분제의 모순을 고민하던

옛 시인이자 단명할 수밖에 없었던 지식인 허난설헌의 부활이 이 시대

여성들에게 갖는 의미는 크다.

딱히 허난설헌의 무덤 뿐만 아니라 역대 가부장제 사회에서 슬프게 죽어간

여성주의자들의 무덤을 역사화하고 그들 삶의 흔적을 돌아보는 순례코스로

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18세기 영국 소설가 브론티 자매의 고향에는

얼마나 많은 여행객들

이 몰리는가.

벌써 많은 여성주의자들은 여성적 문화유산을 남긴 이들의 유적을 찾아

국경을 넘어 여행하고 있다.허난설헌의 무덤을 시작점으로 하는 페미니스트

문화유산 순례 행로가 조만간 이 땅에서 만들어지고,또 인터넷에 올라 널리

알려졌으면 한다.

세번째로 내가 여성국극을 들고 나서는 이유는 그것이 근대적 유물이면서

또한 이 시대의 흥미로운 스펙터클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졌기

때문이다.그리고 마침 지금 그러한 움직임이 일고 있다.

지난달 나는 김경수여성국극예술단이 무대에 올린'호동왕자'를

관람했다.여성국극은 근대화가 어느정도 진행돼 라디오도 듣고 연극도 보기

시작한 관객을 위해 만들어진'한국적'뮤지컬이다.근대 초기에 완성된

판소리와 서구에서 들어온 흥행성

예술을 접합해 만든 종합대중예술이다.일본의'다카라즈카'(塚)처럼 여자들만

등장해 여성팬을 더욱 확보한 인기 공연물이다.

나는 텔레비전시대에 밀려난 이 국극이 새로운 대중문화시대에 접어들면서

다시 한번 재기하기를 바란다.일본의'가부키'(歌舞伎)나 중국의'경극'(京劇)이

현대적 예술품으로 새롭게 일어나듯 국극에서 그 가능성을 보기 때문이다.

대단한 시대적 예술가가 있다면 국극을 대단히 흥겹고 의미있는

대중문예작품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고,이런 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정부나 뜻있는 기업가들의 지원이 필요하다.같은 맥락에서 무성영화 변사의

재등장도 내가 즐겁게 관람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공연물이다.

문화유산은 적극적 문화생산을 위해 내가 요리하고자 하는'거리'며,특히

내가 지금 보고 싶은 것,지금 삶에서 되살려내 힘을 얻고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어떤 것이어야 한다.그것은 나를 만들어갈 비전이어야 한다.

조 혜 정 교수

〈연세대.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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