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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도 모차르트도 아닌 ‘베토벤 바이러스’인 까닭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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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호 06면

클래식 음악이라는 특수한 소재로 과연 시청자를 끌어모을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던 MBC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는 우려와 달리 종반으로 치달으면서 시청률 20%에 육박하는 괴력을 뿜어냈다. ‘드라마의 혁명’으로도 불린 그 드라마는 ‘강마에’ 역을 했던 배우 김명민을 대중에게 재각인시켰고, 그가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자주 내뱉던 ‘똥덩어리’란 말은 올해의 유행어가 됐다. 드라마의 성공과 함께 클래식 음악계도 고무됐다. 관련 음반은 3만5000장이나 팔려 나갔고, 각종 오케스트라 연주회의 매표율 증가도 보고되고 있다.

장정일이 만난 작가-바이올린 활 대신 펜을 선택한 칼럼니스트 최은규

나는 이 드라마를 보지 못했다. 워낙 텔레비전과 담을 쌓고 살아서 그렇다. 비록 드라마를 보진 못했지만, ‘종합병원’이나 ‘베토벤 바이러스’와 같이 전문 직종이 드라마화돼 인기를 얻을 때마다 꾸역꾸역 생겨나는 호기심은 억누르기 힘들다. ‘의사들은 혹은 음악인들은 저 드라마를 어떻게 봤을까?’ 마침 12년 동안 부천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있으면서, 여러 지면에 음악평론을 기고해 왔던 최은규씨가 첫 책을 내고 필자와 만났다.

“‘강마에’ 때문에 드라마를 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김명민씨에겐 제가 아는 모든 지휘자의 모습을 합쳐 놓은 듯한 표현력이 있습니다. 물론 초반에는 비현실적인 상황 설정이나 전문성이 떨어지는 부분도 있었죠. 말단 공무원의 제안으로 갑자기 오케스트라가 뚝딱 만들어진다거나, 트럼펫이 나오지 않는 부분에서 트럼펫이 연주하고 있다거나 하는….

하지만 귀에 꽂히는 선곡으로 클래식 대중화 바람을 일으킨 것이나, 핸디캡이 있는 인물들이 오케스트라 활동을 통해 꿈을 이루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클래식에 대한 거리감을 좁힌 것이 마음에 들더군요. 보통 클래식 음악을 한다고 하면 어마어마한 갑부 집안인 줄 알지만 다 그런 건 아니거든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음악이 좋아서 오케스트라 활동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드라마에 그대로 표현돼 클래식에 대한 편견을 깨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고 생각됩니다.”

바이올린과 같은 기악은 보통 아주 어린 시절부터 영재 교육을 받아야 하는데, 최은규씨는 13살이 돼서야 처음 바이올린을 손에 잡았다. 그뤼미오와 하스킬이 연주하는 모차르트 바이올린 소나타를 듣고 이 악기를 배우고 싶었으나,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해 자주 아팠던 데다가 주변에 음악학원이 없어서였다.

뒤늦게 바이올린을 배워서 예고와 음대에 진학한 7년 동안, 바이올리니스트가 되려는 일념만으로 살았던 최씨가 오케스트라 연주자로 꿈을 전환한 것은, 독주자로서의 한계를 느껴서였다. 그랬던 그가 2004년, 비에냐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2번 협연을 마지막으로 1992년부터 몸담았던 부천필하모닉 상임 단원직을 은퇴했다.

“연주란 어떻게 보면 완전한 창조가 아니라 일종의 재현입니다. 악보라는 텍스트가 앞서 존재하고 그것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지가 연주가의 일이지요. 하지만 글을 쓰는 행위는 텍스트 자체를 만드는 것이기에 더 매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연주활동과 글쓰기를 겸해 왔으나 어느 순간 그 활동이 서로 모순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공연장에서 연주를 한 후 집으로 돌아와서 다른 공연에 대한 리뷰를 쓴다는 자기 파괴적인 행위가 몹시 괴로웠죠.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하루 중 몇 시간을 연습에 할애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다른 일을 하기가 힘들지요. 그동안 바이올린 연주에 많은 시간을 바쳤으니 이제 어린 시절 품었던 꿈 가운데 하나였던 글쓰기에 매진하자고 생각했습니다.”

『교향곡은 어떻게 클래식의 황제가 되었는가』(마티, 2008)는 “글쟁이로서 제2의 인생을 살겠다”는 그녀의 출사표다. 저자는 이번 책에서 ‘베토벤 바이러스’가 클래식이라는 협소한 소재를 극복하고 대중에게 다가갔던 것과 똑같이 “클래식 음악이 귀족의 음악이라거나 혹은 특정 계층의 음악이라는 편견을 깨”고자 한다.

흔히 모차르트나 베토벤과 같은 작곡가들이 갑자기 영감을 받아 음악을 작곡해내거나, 이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딴 세상에 살 것만 같은 천재적인 인물로 신격화되곤 하지만, 저자는 “훌륭한 음악작품은 작곡가 개인의 천재적 영감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조건 속에서 변화하고 발전해갔다는 사실”을 부각시켜 자연스레 클래식 음악을 특수 계층의 전유물이 아닌, 우리 모두의 음악으로 되돌려 준다. 예컨대 교향곡이 음악회장을 접수하게 된 것은 프랑스 혁명 이후 중산층의 경제적 성취와 관련이 있다는 거다.

자기가 좋아서 듣는 게 음악 취미라지만, 클래식 음악을 듣는 사람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급수 같은 게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교향곡은 클래식 초심자나 듣는 음악이고, 클래식에 깊이 취하게 되면 교향곡보다는 실내악을 듣게 된다’는 일설 따위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 또한 오랫동안 ‘듣보잡’처럼 위의 일설을 신봉해 왔다.

“교향곡은 본래 이탈리아 오페라 서곡에 불과했던 짧은 기악곡이었으나, 다양한 악기를 통해 다채로운 음향과 풍부한 화음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장점이 작곡가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작곡가들은 교향곡에서와 같은 복잡한 대위법이나 현란한 음향효과를 사용해서 궁정의 고용인에서 벗어난 독립음악가로서 예술적 능력을 보이고자 했죠. 실내악은 연주 인원이 적기 때문에 정교한 앙상블을 이뤄내기에 유리하지만 소리의 다채로움에 있어서는 교향곡에 미치지 못하고, 협주곡은 협연하는 독주자에게 초점이 맞춰지다 보니 교향곡에 비해 단조롭습니다.”

책의 제목 『교향곡은 어떻게 클래식의 황제가 되었는가』를 달리 부르면 ‘베토벤은 어떻게 교향곡의 황제가 되었는가’. 그 만큼 이 책에서 베토벤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교향곡 형성에 이바지했다면, 베토벤이 쓴 아홉 개의 교향곡은 이 장르의 완성이다. 베토벤 이후의 작곡가들은 마치 하느님과 씨름을 했다던 야곱처럼, 베토벤의 교향곡을 넘어서기 위해 고심했다.

초등학생도 따라 하는 베토벤 교향곡 5번의 ‘운명이 노크하는 소리’는 교향곡의 대명사일 뿐 아니라, 클래식 음악의 대명사다. 바로 그것이 ‘바흐 바이러스’도 ‘모차르트 바이러스’도 아니었던 이유다. 저자는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5번·6번·9번 외에, 광기가 넘치는 7번 교향곡을 초심자들에게 특별히 추천한다.


‘장 작가’란 줄임말로 불리는 장정일씨는 시인·소설가·희곡작가·책 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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