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원대하나 괴로운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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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8강전>
○·이창호 9단 ●·이세돌 9단

제8보(73~80)=타협은 좋은 것이지만 호랑이 등에 타고 나면 타협이 불가능하다. 백△의 절단은 바로 기호지세(騎虎之勢)다. 돌아갈 길은 없고 오직 전면전만 남았다. 타협의 명수 이창호 9단으로선 참으로 가고 싶지 않은 길이다. 이 장면에서 일찌감치 던져 둔 흑▲의 한 방이 빛을 발하고 있다. 73으로 나갈 때 74로 받지 않을 수 없다는 것. 그러고도 아직 A쪽으로 활용하는 뒷맛이 남았다는 것. 뼛속까지 시리게 만드는 이세돌 9단의 수읽기다. 포위당한 흑이 75로 끊고 77로 밭 전(田)자의 가운데를 째고 나오자 백은 일단 응수가 끊겼다. ‘참고도1’은 4까지 안 된다. 그렇다면 이창호는 헛것을 본 건가.

아니다. 78이 있다. 이 수는 선수. 흑이 ‘참고도2’처럼 어딘가 응수를 하다가는 백2가 성립되며 상변이 전멸한다. 따라서 78이 놓이는 즉시 흑은 79로 받아야 한다. 그 다음 80으로 흑 대마를 양분하는 것이 이창호 9단이 그린 원대한 그림이다. 77·79를 당한 이상 실리는 큰 차이가 나버렸지만 양 대마를 공격하여 일거에 만회한다는 구상이다. 화려하다. 다만 원해서 선택한 길은 아니다. 이창호는 이런 불확실성을 싫어한다. 더구나 ‘공격’은 이창호의 선택과목이고 ‘타개’는 이세돌의 전공과목이다. 그러나 몇 번의 빛나간 행마로 인해 축에 몰리듯 이 길을 가고 있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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