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세기를찾아서>9. 21세기의 실크로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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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위스키다라 머나먼 길 찾아왔더니…'로 시작되는 터키 민요는 그 경쾌한 리듬과 사랑의 이야기 때문에 애창되는 노래입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차드르로 얼굴을 가려야 하는 금욕과 절제의 이슬람 땅에서 여인들의 사랑노래가 불려진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지금도 위스키다라 선창에서 배를 내리면 맨 먼저 모스크의 장중한 모습을 마주하게 되고 모스크의 첨탑에서 울려오는 코란의 낭송이 마치 어른들의 꾸짖음처럼 분주한 선창을 압도합니다. 그러나 위스키다라가 실크로드의 종착지인 이스탄불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이러한 노래가 충분히 이해됩니다. 위스키다라의 노래는 실크로드에 피어난 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찍이 동서무역의 중심축이었던 터키에서는 실크로드의 자취를 곳곳에서 만나게 됩니다. 우선 1천만명이 넘는 이스탄불의 인구가 그렇고 그랜드 바자르(grand bazaar)와 이집트시장(Egyptian Bazaar)에 운집한 사람들과 상품의 더미가 그렇습니다. 마호메트2세가 실크로드를 장악하기 위하여 쌓은 루멜리성이 지금도 보스포루스해협을 지나는 선박들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로마가 수도를 이곳으로 옮겨온 이유도 이곳이 동서문물의 집산지(集散地)였기 때문이었으며 십자군 원정 역시 콘스탄티노플에 축적된 부(富)를 겨냥한 것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곳에 남아 있는 거대한 성당과 모스크, 토프카피궁전의 엄청난 보물, 그리고 14t의 금과 40t의 은으로 장식한 돌마바체궁전의 사치가 모두 세계무역의 중심지가 향유했던 부의 크기를 짐작케 합니다.

실크로드는 당신도 잘 알고 있듯 당시의 세계 무역로였습니다. 동방에서 오는 모든 문물이 이곳을 거쳐 유럽으로 퍼져갔으며 유럽의 산물들 역시 이곳을 경유하여 동방으로 실려갔습니다. 터키는 세계문명의 동맥과도 같은 이 실크로드를 개척하고, 지배하고, 관리한 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중세와 근세를 통하여 가장 많은 부를 축적하였던 이스탄불이 지금은 세계무역의 중심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비단과 차와 향료는 이제 더 이상 첨단상품이 아닙니다. 경제발전·세속화·근대화는 케말파샤 이후 변함없는 국가의 목표가 되어 왔지만 터키의 국제적 위상에서 과거의 영광을 읽을 길은 없습니다. 불안한 정치, 만성적 국제수지 적자와 인플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터키는 결코 초조해하며 달려가는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넓은 국토와 풍부한 광물자원, 그리고 무엇보다 식량자급이라는 든든한 기초가 그러한 여유를 만들어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근대화와 경제성장을 유일한 국가목표로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또 하나의 목표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만TV의 칼라치부장도 터키가 당면한 어려움을 솔직히 인정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터키의 내셔널리티는 관용과 대화임을 전제하고 인간소외·환경파괴등 급속한 자본주의적 경제성장의 경로가 보여준 어두운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하여 ‘인간중심의 경제건설'이라는 양보할 수 없는 목표를 터키는 일찌감치 합의해 두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터키의 고민하는 지성을 통하여 일찍이 동과 서를 연결하였던 실크로드가 이제는 새로운 동(정신적 가치)과 서(경제적 가치)를 연결하는 ‘21세기의 실크로드'를 개척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근대화라는 서구적 가치와 관용이라는 동양적 가치가 융화되는 새로운 실크로를 건설하는 것이 진정한 선진국으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바로 이러한 가치가 이슬람 모스크의 문화라고 하였습니다. 모스크는 기도소리는 단일한 기능을 갖는 종교적 공간이 아니라 병원·도서관·대학·목욕탕·시장등이 통합된 문화 콤플렉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나라의 어떠한 전통속에도 문화는 그러한 통합적 실체로 존재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삶이란 원래 통합체이며 문화란 그러한 삶의 형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특정문화에 대한 심취보다 문화일반의 실체에 대한 보다 겸허한 반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실크로드는 21세기에 복원되어야 할 ‘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세기를 고민하는 모든 사람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은 과거의 실크로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고 신속한 도로가 지구를 하나의 촌락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더구나 정보고속도로는 우리의 생활과 사고의 틀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킬 것으로 예상됩니다. 바로 이 점과 관련하여 실크로드는 당신의 말처럼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실크로드에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두 가지의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실크로드는 일방로가 아니라 양방로(兩方路)였다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또 하나의 교훈은 실크로드는 문(文)과 물(物)의 교류였다는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의 국제적 불평등이 주로 경제교류에 의하여 구조화되었다는 당신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경제교류는 이익을 가운데 두는 공방(攻防)의 관계며 부등가교환이 그것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실크로드가 글자 그대로 비단같은 아름다운 길이 되기 위해서는 물의 교류보다 문화의 교류가 앞서야 할 것입니다. 손익을 계산하지 않는 교류, 상대방을 배우려는 진정한 문화적 대화야말로 세계의 단색화를 막고 진정한 세계화의 길을 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각자의 삶이 존중되어야 하듯 다양한 문화가 응분의 대접을 받을 때 비로소 우리의 생각이 깊어지고 타인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것이 상품의 형태를 띠지 않은 문화여야 함은 물론이며 경제교류의 첨병으로서의 문화가 아니어야 함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신영복 성공회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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