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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찾아서>23. 협산 靈泉禪院 上.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0면

묻는다:어떤 것이 협산의 경계입니까.

답한다:새끼 안은 원숭이

청장령 너머로 돌아가고,

새들은 꽃을 쪼러 와

벽암천 앞에 내려앉는다

(猿抱子歸靑山章裏

鳥啣花落碧巖前).

한무명승이 협산 영천선원(일명 협산사)에 주석하고 있는 협산선회(夾山善會·805∼881)선사를 참문한 선문답이다.

무명승의 물음은 ‘협산의 깨달은 경지가 어떠하냐’는 것이다.여기서 협산이라는 장소는 선회의 깨달은 경지를 뜻한다.경계라는 말은 원래 산스크리트어에서는 고카라(Gocara), 또는 비샤야(Vishaya),가티(Gati)라고도 하는데 ‘어떤 행위가 발생할 수 있는 영역이나 장(場)’을 의미한다.특히 ‘고카라’는 소들이 풀을 뜯어먹기도 하고 노닐기도 하는 목초지를 뜻한다.즉 소들이 그들의 삶을 위한 목초지를 갖고있듯 인간도 자신의 내적 삶을 영위할 영역 또는 장을 나름대로 갖고 있다.그러니까 자신의 세계관대로 살아가는게 바로 그 사람의 ‘경계’다.

협산의 대답은 멋진 한 구절의 시다.지금 자신이 살고있는 협산의 풍경을 한껏 즐거운 마음으로 수용하고 있을 뿐이다.담담한 협산선사의 마음 속에는 자못 잔잔한 시흥(詩興)마저 감돌고 있다.

선학적으로 풀이한다면 선이 목표하는 임운자연(任運自然)의 경지에서 주객(사람과 자연)이 하나가 돼 두두물물(頭頭物物)이 그대로 실상임을 온몸으로 체감하며 살고있는 도인의 경지다. 협산의 이같은 대답은 한 시대 앞서 우두종의 천주산(안휘성 잠산)숭혜(崇慧)선사(?~779)가 토로했던 깨침의 경지기도 하다.그는 ‘달마가 서쪽에서 와서 전법하려한 불교 근본정신이 뭐냐’는 한 중의 질문에 ‘흰 원숭이 새끼 안고 푸른산 봉우리에서 왔다갔다 하고,벌과 나비는 푸르른 꽃술 사이서 꽃을 쪼아 먹는다’고 자신이 머무르는 천주산의 정경을 드러내 보여주었다.

우선 절이 위치한 호남성 상덕지구 석문현은 외국인 출입제한 지역이었다. 겨우 가는 날 아침에야 호남성 공안국(경찰청)에 차를 대고 기다려 중국 공안부 출입관리국이 발행하는 ‘외국인 여행증’을 받았다.꼭 가보고 싶은 고찰인데 못가게 될까 조마조마했던 근심이 확 풀렸다.이 선찰은 협산선사뿐 아니라 동아시아 선문의 제1서(書)로 지금도 선승들의 교과서인 ‘벽암록’을 원오극근선사(1063~1135)가 편저한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었다.우선 방장 명선(明禪)화상을 만나 화두 ‘협산경계’를 물었다.그는 뒷산 봉우리를 가리키며 저게 ‘청장령(靑山章山令)’이고 벽암은 1.5km쯤 가면 노천 온천수가 나오는 ‘벽암천’이 있는데 거기에 큰 바위가 있다고 한다.이는 청장과 벽암이 곧 실재하는 지명인 고유명사라는 얘기다.그런데 지금까지 한국·일본등에서 출판된 선종서적들은 거의 모두가 ‘청장’을 푸른산,‘벽암’을 푸른 바위라고 번역해 왔다.물론 시적으론 이게 더 근사하기도 하다.

어쨌든 기자도 이 얘기를 듣기 전까지는 ‘푸른산’‘푸른바위’로만 알고 있었다.아예 협산사 소개서는 시의 ‘청장리’를 청장령(靑山章山令),‘벽암전’을 ‘벽암천(碧巖泉)’으로 써놓았다.방장의 설명을 듣고나니 지금까지의 번역들이 화두가 상징하는 의미엔 상관없는 ‘하찮은 것’이었다 하더라도 바로 잡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기자는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임을 새삼 확인하는 큰 수확을 거두었다.모든 피로가 깨끗이 사라지며 현장답사를 통해 얻는 이런 수확이 나름으론 소중하기만 했다.

다음으론 원오선사가 ‘벽암록’을 편저한 방장실에 달았던 ‘벽암’이란 편액이 있느냐고 했더니 유실돼 없다며 또 한수 가르쳐준다.송대 임제종의 거목인 그가 ‘벽암록’을 쓴 곳은 물론 방장실에서도 했지만 오히려 벽암천 바위밑 토굴에서 주로 했다고 한다.이것도 지금까지 기자가 알고 있던 ‘방장실 집필’이라는 코딱지 같은 ‘지식’에 견문을 넓혀주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급한 마음으론 벽암천으로 달려가 보고 싶었지만 우선 경내를 돌아봤다.

방장이 직접 안내에 나서주었다.절은 문혁때의 훼손 부분을 완전 복원,말끔했다.절 문에서 천왕전까지의 방생지 위에 놓은 굴곡형의 돌다리 구곡교(九曲橋)는 한폭의 그림 같기도 했다.원오의 ‘벽암록’에 못지 않은 또 하나의 명성은 바로 협산사가 ‘다선조정(茶禪祖庭)’이라는 점이다.협산선사가 설법중 ‘다선일미(茶禪一味)’를 설파했고,후일 원오선사가 이를 휘호로 써 편액에 새겨 놓았었는데 그의 제자중 한사람인 일본 승려가 그 편액을 일본 나라 대덕사(大德寺)로 가져가 현재 사찰 보물로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대웅전 앞마당에는 화두 ‘협산경계’를 자연석 바위위에 원숭이·새등의 조각을 올려 놓아 양쪽으로 재미있게 형상화해 놓았다.선당과 조사전은 축성중이다.벽암천으로 가던중 탑림(塔林)에 들렀다.선회묘탑에는 ‘당선회비구대화상묘(唐善會比丘大和尙墓)’,원오묘탑에는 ‘송불과원오극근진각대선사탑(宋佛果圓悟克勤眞覺大禪師塔)’이라는 탑명이 붙어 있다.

모두 93년 복원한 전탑인데 선회는 4면 3층,원오는 6면 3층이다.두 탑 모두 청대에 훼손됐으며 사리탑이었다고 한다.원오묘탑 복원비는 일본 임제종 구택대학이 화주를 했다.벽암천은 둥근 언덕 밑에서 온천수가 물방울을 일으키며 솟아오르는 맑고 맑은 2개의 샘인데 옆으론 내가 흐른다.원오선사가 ‘벽암록’을 집필했다는 바위굴은 지금은 바위가 내려앉는 바람에 막혀버려 보이지 않는다.이밖에도 협산사는 산문에서 절까지의 거리가 10여리나 돼 말을 타고 다녔다고 해서 ‘기마관문(騎馬關門)’이란 별칭이 붙었고,협산선사가 처음 개산할 때는 식인(食人)이 살고 있었다고 전해온다.

협산은 뱃사공을 하며 살던 스승 화정선자(일명 선자덕성)선사가 선문답중 삿대로 밀어 물속에 던져버리자 헤엄쳐 나오면서 깨친 남다른 오도의 계기를 가진 선장이기도 하다.그래서 그는 협산속의 식인에게도 거침없이 다가가 끝내는 감화시켜 불법에 귀의케했다고 한다.명성방장은 곧 국제 벽암록연구회를 발족,대대적인 국제세미나를 열 예정인데 그때 초청할테니 꼭 오라는 말로 작별인사를 대신했다.

증명:月下 조계종 종정 ·圓潭 수덕사 방장

글:이은윤 종교전문기자 사진:장충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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