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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나다>서울고전고대문헌연구소 박기용.조철수 박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7면

대한민국 보통 대학원생 金아무개씨가 읽은 원전(原典)목록에 20세기 미국작가 존 그리샴의'타임 투 킬'은 있어도 기원전 4세기 전후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소크라테스의 변명(辯明)'은 없다.이유는 간단하다.

첫째,그리샴의 소설은 마음만 먹으면 시내 대형 서점 외서부(外書部)에서 영문원전을 손쉽게 살 수 있다.둘째,능숙하진 못해도 중.고교 6년 배운 영어실력이면 사전 찾아가며 읽기에 불가능한 책은 아니다.반면'소크라테스의 변명'은 영 다르다.영문 번역본이라면 몰라도 원전? 플라톤이 썼으니까 고대 그리스어일텐데 그걸 어떻게 읽는다? 국내에서 구할 수나 있나? 사정이 이렇다고 굳이 金씨를 나무랄 것은 없다.

그러나 대한민국 인문학(人文學)을 통틀어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데 박기용(58.서울대언어학과 강사),조철수(47.히브리대 객원교수.서울대종교학과 강사) 두 사람의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가 있다.

“호머 시대의 그리스어마저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손꼽을 정돕니다.그나마 우리에게 문명의 상한(上限)은 그리스에 멈춰 있습니다.그리스를 넘어 메소포타미아문명이 남긴 문헌이 이미 18세기부터 해석되기 시작했는데도 말입니다.”이들에게

인류문명이 남긴 읽을거리는 기원전 3000년 전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소크라테스의 변명'이나 라틴어로 쓰인'유스티니아누스법전'은 물론이고 아카드어로 된 '함무라비법전',고대 이집트어로 쓰인'사자의 서',수메르어로 쓰인'인안나의 저

승여행'같은 원전으로 말이다.단지 시간이 오래됐다고 의미가 있는 것만은 아니다.함무라비법전과 이에 앞선'우르남무법전'에는 이후 온갖 법전에 등장하는 '살인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인류 법전통의 출발이,여신(女神) 인안나가 저승을 찾아갔다가 죽음을 당하고 다시 살아나는 수메르 신화에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오디세우스의 저승여행의 원형이 담겨있다.인류 최고(最高)의 책이라는 성서의 천지창조나 대홍수와 닮은 꼴의 이야기가 수메르어나 아카드어로 쓰인 창세설화에서 발견

되는 것 역시 단순한 우연은 아니다.

“대학 역사가 1백년이 넘는데 고전학과(department of classics)하나 없다는게 말이 안됩니다.영문학과나 서양사학과에서도 라전어나 그리스어를 필수과목으로 가르치지도 않고요.사법고시 준비하는 학생은 늘어도 로마법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영어를 잉글리시어라고 부르는 격'이라며 라틴어 대신 라전어(羅典語)란 이름을 고집하는 박기용 박사는 40대 중반의 만학도(晩學徒)로 언어학과 박사과정에 입학,처음 서울대도서관 귀중본서고에 들어섰을 때의 흥분을 돌이킨다.아시리아학(Assyriology:메소포타미아의 언어.역사.사회등을 망라해 연구하는 학문.수메르어나 아카드어도 물론 포함된다)에 관한 문헌이 서가 열개 분량은 족히 되게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경성제대시절 일본인들이 모아놓은 것인데 해방

이후 거의 찾는 이가 없었더란다.

그러나 낙담은 때이르다.'인문학의 시간여행'을 꿈꾸는 두 사람의 계획은 지난달 22일 서울고전고대문헌연구소(02-264-4774)를 열면서 본궤도에 올랐다.우선 제1기 수강생 20명을 모집,오는 4월1일부터 6개월동안 라틴어.그리스어.범어(梵語).히브리어.아카드어.고대이집트어.수메르어를 가르칠 계획이다.사제가 될 꿈을 꾸던 고교시절'라전어'에 매료된 이래 지금까지 1백61개 언어를 익힌 박기용 박사와 이스라엘 히브리대에서 최우등 성적(숨마 쿰 라우데:summa cum laude )으로 아시리아학과 성서학을 전공하고,현재 수메르어 사전 편찬사업을 진행중인 조철수 박사가 직접 강사로 나선다. <이후남 기자>

<사진설명>

함무라비 왕의 법전이 새겨져 있는 비석.기원전 1700년께의 것으로

추정된다.서울고전고대문헌 연구소를 개원한

박기용(인물).조철수박사.朴박사는 1백61개 언어를 익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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