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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인터뷰>진로盃서 9연승 위업 달성 서봉수 9단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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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프로기사 서봉수9단의 승부인생은 한마디로'살아남기'의 연속이었다.바둑계의 강자로서 한시대를 풍미하면서도 그는 더욱 강한 자들의 위협으로부터 한시도 자유롭지 못했다.당대 최고수 조훈현9단과는 15년동안이나 힘겨운 전쟁을 치렀다.모두

3백번도 넘게 싸워 지고 또 졌으나 그중에서 1백번은 이겼다.질긴 생명력과 치열한 승부정신으로 끝끝내 패퇴하지 않고 살아남았다.그는'만년 2등'이었으나 조훈현의 천하통일을 용납하지 않은 유일한 적수로서 어떤 섬광과 같은 이미지를

팬들의 가슴에 심어주었다.서봉수는 80년대 후반부터 동갑내기 조훈현,후배 이창호.유창혁과 4인방을 이뤄 한국바둑의 세계제패를 이룩하기도 했다.그러나 94년부터인가.야생(野生)의 서봉수가 서서히 시들기 시작했다.조훈현.이창호.유창혁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데 서봉수는 종적이 묘연했다.저잣거리에서 혼자 바둑을 배워 스스로 터득한 한국식 실전바둑으로 조훈현.이창호같은 정통파 천재들에게 대항했던 서봉수였으나 그 밑천도 바닥을 드러낸듯 보였다.모두들'서봉수는 끝났다'고 공공연히 말했다.그러나 서봉수는 예상을 뒤엎고 되살아났다.진로배에서 중국.일본 대표기사들을 상대로 9연승이란 역사적인 대기록을 세우며 또다시 부활한 것이다.한편의 서바이벌 게임같은 서봉수의 승부인생.그를 만나러 서울종로구관철동

의'서봉수도장'으로 찾아갔다.

-대기록을 다시한번 축하합니다.이기니까 역시 기분이 좋지요.

“갑자기 바빠져 얼떨떨합니다.나쁘지는 않군요.”

-제자는 좀 늘었습니까.

“아닙니다.그냥 한명입니다.조용해서 좋지요.”

서봉수 도장은 옛 한국기원 건물 5층에 있다.3층까지는 네온이 번쩍이는

소주방,4층은 한국기원 종로지원.5층 한쪽에,그러니까 정글같은 도심속에

마련된 조그만 공간이 서봉수 도장이다.어린 아이가 그 5층까지

걸어다니기는 여러가지로

쉽지 않을 것같다.

應씨배우승 가장 기억남아

-왜 이곳을 떠나지 않습니까.바둑에는 좀 번잡한 동네 아닌가요.

“그래도 마음이 편해요.30년 가까이 지낸 곳이거든요.”

하기는 이 건물은 서봉수에게 영광과 추억의 장소다.몸서리나는 승부가

모두 이곳에서 치러졌다.그래서인지 徐9단뿐 아니라 조훈현9단이나

김인9단등도 이곳을 즐겨 찾는다.

-徐9단이 명인을 처음 따내던 무렵 기억납니까.실력의 1백20%를 발휘하던

시절 말입니다.

“그때는 투지가 대단했죠.아무리 얻어맞아도 다시 만나면 질 것같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하수는 겁이 없다는데 내가 겁이 없었던

거지요.”

-하지만 그때 徐9단의 승부철학은 매우 엄했다고 기억됩니다.'승부사에게

변명은 없다.운도 존재하지 않는다.승부수니 기세니 하는 모호한 말은

가소로울 뿐이고 신의 눈으로 본다면 오직 정수와 실수만이 존재할

뿐이다'는 식으로 말했죠.

기억나십니까.

徐9단은 웃었다.그러면서도 정색을 하고 말한다.

“지금도 생각이 바뀐건 아닙니다.바둑이 하도 어렵고 체력이 뒤를 받치지

못해 예전같은 투지는 잃어버리고 말았지만….”

徐9단은 독설가였다.야성과 확신의 기사로도 통했다.팬들은

그가'순(純)국산'이라고 열광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조남철.김인.조훈현등

당대의 정상들이 모두 일본유학파이기 때문이었다.지금은 순 국산

이창호가 정상이라서 의미가 퇴색했지만.

-이번 9연승할때 마음을 비운다는 얘기를 여러번 했는데 그게 실제로

가능한 겁니까.徐9단의 승부철학은 무엇입니까.

“내게 승부철학이 있다면 그건'포기하지 않는다'입니다.마음을 비운다는

건 다른 얘기지요.이기기 위한 방법이랄까,아무튼 마음을 비우지 않으면

이겨지지 않으니까 이기려면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徐9단은 좀더 설명한다.

“꼭 이겨야겠다 생각하면 겁이 납니다.세력을 쌓자니 뛰어들까 겁나고

실리를 취하자니 엷어질까 겁나고.마음이 오그라들죠.형세가 나빠지면

사기수도 두고 싶고 때로는 자폭도 하고 싶고.바둑은 어차피 모르는 길을

가는 것이지요.따라서 나름

대로 단순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최선을 찾아간다면 적어도 두려움은

안생깁니다.흐름에 순응할 수 있다는 얘기지요.”

젊었을 때의 승부사 서봉수는 온몸으로 살기 비슷한 기운을 토해내곤

했다.이제는 40대 중반.徐9단의 말과 생각은 예전보다 굉장히

부드러워졌다.마음을 비운다는 건 말하자면 경험에서 얻은 현실적 방편인

셈이다.계속 지고 또 지면서 몸

으로 터득한 비결인 셈이다.유창혁9단은 이것을“손따라 둔다”고

표현한다.그렇다면 徐9단도 劉9단처럼 이창호9단과 맞싸울 자신감을

회복한 것일까.

-슬럼프에 오래 빠져 있었죠.계속 질 때는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자업자득이라 생각했습니다.타고난 재주도 부족한데 가장 중요한

체력관리도 못하고 자세도 시원찮았으니 질 수밖에 없는 거지요.”

徐9단은 성적이 바닥을 헤맨 지난 3년간 어느 때보다 바둑생각을 많이

했고 공부도 많이 했다고 한다.

“승부세계는 냉엄해서 지면 찬바람이 쌩쌩 불지요.덕분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 공부에는 도움이 됐습니다.”

175㎝의 키에 60㎏을 넘은 적이 없는 마른 체격.걸음걸이나 행동은

어딘지 어수룩하고 표정은 무얼 생각하는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것이

그간 徐9단의 외모가 주는 인상이었는데 가만히 보니 말을 아주 잘하는

사람이다.화제를 바꿔

좀더 아픈 곳을 건드려봤다.*** 패배도 最多기록 행로 험난

-조훈현9단과는 가슴아픈 은원관계지요.어떻습니까.曺9단과 자신을

비교한다면.

이 대목에 와서부터 徐9단은 훨씬 느릿하고 조심스러워졌다.

“曺9단은 오기.자존심.고집이 다 강한 사람이지요.많이 지고 많이 당해

내 가슴에 멍도 많이 들었습니다.언젠가부터 심장이 약해졌는데 아마도

절반은 曺9단 탓일 겁니다(웃음).하지만 그 사람의 천부적 재능은 부럽기

짝이 없습니다.나는

노력형이지 순발력은 없거든요.내 기술은 평생 조훈현의 칼을 몸으로

막아내다 익힌 것이 대부분일 겁니다.그게 내 밑바닥 힘이지요.”

-曺9단이 스스로 키운 제자 이창호9단에게 꺾이는 모습을 보고 어떤

기분이 들었습니까.

“曺9단의 재주는 번쩍이고 화려하지요.이창호는 석상처럼 묵묵히 참고

견뎌 수읽기와 계산으로 그 재주를 막아냅니다.천적이죠.曺9단도 천재고

이창호도 천재지만 두사람은 천적입니다.”

그는 하늘이 내린 천적이란 얘기를 하고싶은 것이다.조훈현이 자신에게

고달픈 운명이었듯 이창호가 조훈현에겐 피할 수 없는 운명이란 그런 얘기

말이다.

-지난번 9연승하는 동안 반집승을 세번이나 거뒀죠.한번은 마지막 두수를

남겨놓고 역전한 일도 있는데 그건 분명 운이라 말할 수 있겠지요.

“운이지요.”

-그런데 그 행운이 왜 약자에게는 잘 일어나지 않는 걸까요.

“우리는(승부하는 사람들은) 운이라 하면서도 운을 믿지

않습니다.말하자면 비슷할 때 운이 작용하는 것이지,한쪽이 처지면 운이

따르지 않습니다.조훈현과 이창호가 차이가 있다면

한집일까요,두집일까요.실로 간발의 차이인데 이 극미한 차이

가 승부에서는 넘기 어려운 장벽이 됩니다.”

-應씨배 우승때도 운이 좋았다고 한걸로 기억되는데….그 우승만은 평생

잊을 수 없겠지요.

“2등이 한이 돼 1등을 해보고 싶었는데 한풀이를 한 셈이죠.기쁨은

잠깐이고 괴로움은 길었지만(徐9단은 이 우승후 3년간 슬럼프에 빠진다)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우리는 이 대목에서 대폿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徐9단은 한국에서 1천승을 가장 먼저 달성했지만 패배도 5백승이 넘어

국내 최다 기록입니다.많이 졌다는건 그만큼 행로가 험난했다는 방증인데

앞으로는 어떨까요.

“체력관리를 잘 한다면 40대가 오히려 연령적으로 가장 좋은 나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이창호는 일찍 꽃을 피웠으나 그런 재능은 매우 특별한

거지요.보통은 갈고 닦아야 완숙의 경지에 이르는데 40에서 50사이가

그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徐9단은 은연중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다.그는 최근의 시련속에서 자신의

기량이 진보했다고 믿고 있었고 당대 고수들과 일전을 치를 각오가 돼

있었다.

“이창호의 약점은 공격입니다.계속 변하고는 있지만 모험을 싫어하는 그

부분이 유일한 약점이지요.자신과 비슷한 최명훈같은 스타일도 좋아하는

것 같지 않더군요.이창호 파해법(破解法)은 여기가 출발점이

아닐까요.조훈현은 계산에 어둡고 유

창혁은 실리바둑에 힘겨워하는 느낌입니다.장점은 다 아니까 약점만

찾는다면 그렇다는 얘깁니다.조치훈은 노력형이고 자기최선을 추구하는데

세계제일이지요.하지만 단수에도 고뇌하며 시간을 물쓰듯 하는 것은 조금

심한 것 아닐까요.고바야시 고

이치(小林光一)는 정상에서 밀려났으나 바둑의 폭은 넓어진 것

같습니다.예전엔 실리만 파는'지하철'이었으나 지금은 마샤오춘(馬曉春)이

지하철이 됐습니다.”

-앞으로 10년간의 세계바둑계를 전망한다면.

“한국은 최강 이창호를 등에 업고 세계를 계속 제패할 겁니다.그러나

이창호도 무적은 아니며 머지않아 바둑열이 높은 중국이 강력하게

도전해올 것 같습니다.국내에선 조훈현.유창혁.최명훈등이 이창호를 쫓고

있으나 쓰러뜨리기는 힘들지 않을

까요.열세속의 공존이랄까,그런 형태가 이뤄질 것 같습니다.”

이창호 9단 약점은 공격

-徐9단은 그럼 어디쯤 서있게 됩니까.

“이창호는 언제나 조여져 있는 끈이지요.완벽한데다 여간해선 긴장을

풀지 않습니다.다행히 창호가 끈을 늦춰준다면 나 역시 공존의 대열에 낄

수 있지 않을까요.”

속마음은 다를 것이다.이창호는 만천하의 목표요,이창호 쓰러뜨리기는

세계바둑계의 화두니까 당연히 徐9단의 화두이기도 하다.'포기하지

않는다'는 그의 승부철학에 비추어 서봉수 역시 남은 세월을 바쳐

이창호를 향해 전진할 것이다.45세

의 서봉수가 쫓는 22세의 이창호.그리고

조훈현(45).유창혁(31).조치훈(41)등등….이들의 파노라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최근 徐9단의 바둑은'실리'에서 두터움으로 선회하고 있다.徐9단은 그

점을“인생살이에서도 실리는 없어도 두터움은 꼭 필요하더라”고

설명했다.실리는 물론 재물을 말하고 두터움은 인간관계를

말한다.독불장군이요,야생의 표범이라 불리던

서봉수는 변했다.그는 자신의 바둑관을 이렇게 말했다.

“바둑판 위에는 온갖 삶의 형태가

있습니다.군인.전략가.상인.사기꾼.도인,그리고 벼랑에 선 참담한

모습….하지만 한번뿐인 인생에 비해 언제나 새로운 판을 시작할 수

있으니 바둑에는 푸른 꿈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그렇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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