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으로가는간이역>16. 경북 문경시 산양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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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길을 따라 가노라면 선인들의 숨결이 배어있는 우리 역사와 문화를 만날 수 있다.이 땅의 수많은 길들은 무수한 세월속에 생겨나고 사라졌다.경북문경은 예부터 영남과 한양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이미 2세기

에 중원지방으로 세력을 넓히려던 신라가 하늘재(계립령)와 죽령을 뚫었고,조선시대때는 문경새재(조령)가 열려 한양과 부산.고성으로 가는 갈림길 역할을 톡톡히 했다.

영남지방의 영남(嶺南)은 백두대간,즉 문경새재의 남쪽이라는 뜻이다.한강과 낙동강을 잇는 길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신라 제8대 아달라이사금 3년(156)의 일이었다.당시 신라는 백제 땅을 빼앗기 위해 충북충주시상모면과 경북문경시관음

리를 연결하는 하늘재를 개척했다.3년뒤 단양에서 풍기로 잇는 죽령도 생겨났다.

하늘재는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용되다 조선조 태종때 조령이 생기면서 역사에서 사라졌다.조령이 낙동강과 남한강을 잇는 가장 짧은 고갯길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낙동강과 남한강의 수운(水運)은 영남지방의 조세를 거둬들이는데 큰 역할을 했지요.특히 충주에는 조세를 모으는 가흥창(지금의 충주시살미면)이 있었는데 조령길이 하늘재보다 가까웠기 때문에 조령이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경문화원 신동철(申東徹.64)소장의 설명이다.

조령을 넘어 문경으로 들어오다 보면 유곡역(幽谷驛.지금의 문경시유곡동)이 있었다.영남지방 72개 읍의 교통량이 집중됐던 곳이다.조선시대 9개의 간선도로 가운데 상주~대구~밀양~동래를 거쳐 부산진에 이르는 길과 상주~성주를 거쳐 고

성으로 가는 2개의 간선도로가 유곡역을 지났다.그만큼'문경의 역사'는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길의 역사'로 점철돼 있다.

이러한 옛길의 흔적은 고모산성 부근에 희미하게 남아있다.유곡에서 고모산성에 이르는 5㎞의 협곡지대에는 관갑천이 흐르고 선인들은 동쪽 바위벼랑을 따라 'ㄴ'자로 파 길을 냈다.지금도 반질반질해진 바위에서 선인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

다.

고모산성 북쪽끝에 오르면 문경들판이 펼쳐지고 그 뒤로 주흘산(1천75)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문경읍에서 동쪽 계곡을 따라 오르면 하늘재가 나타나고 서쪽 계곡으로 오르면 조령과 이화령의 들머리가 된다.

조령은 1925년 이우리재로 불리던 이화령(梨花嶺)에 신작로가 개통되면서

그 역할을 넘겨주었다.

그러나 이화령 밑으로는 현재 터널공사가 한창이다.이화령이 조령처럼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질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러한 육상교통의 요충지였던 문경의 철도역사는 1924년 12월25일

상주~점촌간 철로가 놓이면서 시작된다.

경북선의 여러 역중 산양역(경북문경시산양면)은 역사(驛舍)가

없다.역명(驛名)만 있고 역사가 없는 역은 전국에 28곳이 있다.플랫폼은

물론 없고 차표는 객차에 올라 차장에게 직접 사야 한다.

“교통이 불편했던 70년대말까지도 서울로 가려면 김천까지 경북선을

이용한 후 경부선으로 갈아탔지요.특히 산양면과 산북면에서 점촌으로

통학하는 학생들에게 열차는 가장 값싸고 편리한 교통수단 역할을

했습니다.”

문경에서 만난 허종섭(許鍾燮.50.청화초등학교 교사)씨는“20여년전만

해도 역사 앞에는 열차를 이용하려는 주민들로 붐볐다”고 회상한다.

70년대 김룡사와 대승사는 문경군과 예천군 중.고등학생들의 단골

소풍지였다.이곳을 가려면 학생들은 산양역에서 내려야 했다.그래서

문경이나 예천에서 졸업한 30~40대 중년들에게 산양역은 학창시절의

추억으로 자리잡고 있다.

지금은 사라진 역사자리에는 등나무 덩굴밑으로 야외의자와 테이블

몇개와 역임을 알려주는 팻말만 남아있을 뿐이다.역사마저 없는 삭막한

들판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산양역.

그러나 그곳에는 도회지와는 다른 시골 사람들의 훈훈한 정이 아직도

흠뻑 배어 있다. 〈문경=김세준 기자〉

<사진설명>

명재상 숨결 그대로

조선시대 명재상인 황희정승의 유물이 보관된 장수 황씨 사정공파의

종택(황방촌).문경의 토속주인 호산춘은 황방촌 옆에 있는 21대

종부집에서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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