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일본의 영광, 일본의 쇠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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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8강전>
○·야마시타 9단(일본) ●·쿵 제 7단(중국)

제8보(107∼125)=야마시타 9단의 마지막은 스산했다. 어딘가 힘써볼 데도 없이 낙엽 구르듯 그렇게 스러져 갔다. 전보의 마지막 수인 백△는 유일한 시빗거리였으나 폭발력이 너무 작아 전체 국세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했다. 쿵제 7단은 107, 109라는 맥점으로 손쉽게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112 대신 ‘참고도’ 백1로 두면 넉 점은 잡을 수 있으나 후수여서 손해다).

예의 바른 야마시타가 안경테를 만지작거리며 가끔씩 눈을 감는다. 낙심에 젖어 있고 서서히 던질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다시금 ‘일본 바둑’에 대한 연민이 끓어오른다. 슈샤쿠, 슈사이, 기타니, 사카타, 후지사와, 다케미야…. 수백 년 일본 바둑의 영광을 이끌었던 그 화려한 얼굴들이 스쳐가고 특히 ‘면돗날’ 사카다의 번득이는 눈빛이 눈앞을 가득 메운다.

122, 124로 한번 부딪쳐 보다가 야마시타가 힘없이 돌을 거둔다. 불과 125수의 단명국. 승부는 질 수 있다. 문제는 내용이다. 이렇게 던질 바엔 왜 진즉 목숨을 걸어보지 않았을까. 강수의 타이밍을 아는 것은 실로 어렵다. 용기와 만용은 한 치 차이라서 때론 인내해야 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죽은 바둑처럼 투혼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게 오늘 일본 바둑의 현주소인 것 같아 서글프다. 야마시타와 함께 일본은 모두 탈락했고 삼성화재배는 다시 한·중전이 됐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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