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대통령의 입' 9년] 33. 후계자 문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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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 1973년 3월 박정희 대통령(左)이 김종필 국무총리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1972년 10월에 시작된 유신은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1979년 10월에 끝났으니 7년의 생을 산 셈이다. 유신이 중반을 넘어섰을 무렵 박 대통령은 어느 외신기자와의 면담에서 후계자의 양성과 평화적 정권교체에 대해 상당히 시사적 발언을 한 바 있다. 나의 메모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정권의 평화적 교체는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정부수립 이후 한 번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이유는 민주주의의 뿌리가 완전히 내려지지 못한 데 있다. 후진사회에서 정권교체가 평화적으로 이뤄지려면 그만한 바탕이 마련돼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억지로 정권교체를 이루려면 정치 불안만 계속될 뿐이다. 그런 예를 여러 나라에서 많이 보고 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도 평화적 정권교체가 가능한 정치풍토를 마련하려는 것이다. 현행 헌법 아래서도 그것이 가능하도록 엄연히 보장되어 있다. 후계자를 양성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민주국가에서는 어느 특정인을 후계자로 지정하고 키우는 일이 없다. 그 사회에서 스스로 성장하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또 언젠가 사석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내가 후계자를 지정했다고 가정해보자. 그 순간부터 눈치 빠른 한국 사람들은 남 모르게 그 쪽으로 줄서기에 혈안이 될 것이다. 결과는 무엇이겠는가. 혼란 밖에 더 있겠는가. 우리 사회는 아직도 근대화가 되어 있지 못해."

한국 사람들이 차기 실권자에게 재빨리 줄을 대려고 하는 심리는 '권력의 잉여가치'의 혜택을 남보다 더 먼저, 더 많이 보려는 심리의 발동이다. 저명한 정치학자였으며 국무총리를 역임한 고 김상협 선생은 일찍이 우리나라의 권력층이 법에 규정된 것 이상의 과잉권력을 각종 규칙이나 행정지도라는 명분으로 무분별하게 행사하는 실정을 가리켜 '권력의 잉여가치'라 부른 바 있다. 바로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권력을 한번 쥐었다 하면 안되는 게 없다는 것이 시중의 얘기였다. 이것을 얻어 먹으려면 눈치가 빨라야 하는 것이다.

그 뿐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도 눈치가 빠르다. 그러니까 그 권력자에 대해 남보다 먼저 충성심을 뚜렷이 표해야 하며, 그것도 과다하리만큼 명백히 표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과잉충성이다. 우리 사회처럼 근대화가 덜 되어 있는 나라에서는 이 눈치보기와 줄서기, 그리고 과잉충성이 건전한 정치발전을 저해하는 주요인으로 작용해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정치발전의 저해요인은 개인의 경우뿐 아니라 조직체 상호 간의 관계에도 적용될 수 있었다. 그리고 권력기관일수록 눈치보기와 줄서기, 그리고 과잉충성의 농도가 더 짙었다.

이러한 현실을 박 대통령은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후계자 양성 문제에 관해 대단히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를 유지해 왔던 것 같다. 박 대통령이 외신기자에게 밝혔듯이 유신헌법에 평화적 정권교체의 길을 터 놓았는데도 국내 정치인들이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었다.

김성진 전 청와대 대변인·문공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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