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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잠 깨어난 일본] 1. 50代 '베이비 붐 세대'가 지갑 열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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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도쿄 세타가야에 사는 주부 구마가이 교코(40)는 일주일에 딱 한번만 가던 수퍼마켓에 요즘엔 두번씩 간다. 아이들이 그렇게 원하던 컴퓨터도 지난달 새것으로 바꿨다. 그렇다고 남편의 월급 봉투가 두꺼워져서 그런 것은 아니다. 경제가 회복되고 있다는 뉴스가 자주 들리고 줄곧 떨어지던 물가도 더 이상 내려가지 않을 것 같아 졸라맸던 허리띠를 조금 풀기로 했다.

구마가이와 같은 가계의 씀씀이가 쌓여서인지 올 1분기 가계 소비 증가율이(전분기 대비 연율 환산) 4.1%를 기록했다. 좀처럼 소비가 늘지 않아온 일본으로선 놀라운 변화다.

다카시마야 백화점 신주쿠 점포의 매니저인 나카즈카 유지도 요즘 출근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백화점 매출이 아직까지 그 전보다 늘어난 것은 아니지만, 매출 감소폭이 줄어 머지않아 플러스 증가율을 기록하리란 희망이 보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상반기 4%였던 매출액 감소폭이 하반기에 3%로 낮아졌다. 올 상반기에는 더 줄어들 것이고, 올해 안에 매출이 증가세로 반전될 것으로 믿는다."

1990년대 이후 사실상 처음인 이 같은 변화는 소비만이 아니다. 건설 경기도 움직이고 있다. 지난해까지 성장률을 갉아먹던 주택건설 투자(기여율 -0.9%)도 올 1분기 드디어 성장에 기여(0.6%)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소비가 회복되고 주택 투자까지 늘어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우선 취업자가 꾸준히 늘었다. 1분기 실업률 4.7%는 최근 3년 사이 가장 낮은 것이다. 특히 일자리가 서비스업과 정보통신.건설업 등 내수산업 중심으로 증가했다.

"일본에 결코 '잃어버린 10년'은 없다. 그 기간은 기업의 구조조정과 고(高)물가 구조 개선 등 우리 경제의 비효율을 고쳐 나간 제도 개선의 과정일 뿐이다. 이제 그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다."(아오키 마사히코 전 경제산업연구소장)

일본 경제의 회복세는 그냥 갑자기 닥친 게 아니라는 뜻이다. 그동안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면서 제도를 바꿨고 시장이 변했기 때문이다. 거품이 꺼지면서 땅값과 집값이 평균 3분의1로 뚝 떨어진 가운데 시장 개방 이후 값싼 중국산 제품이 들어와 생활필수품 가격을 낮췄다. 지난 10여년 동안 유통업체는 힘들었지만 소비자는 싸게 살 수 있어 불황 속에서도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다. 동남아산이 대부분이긴 해도 어지간한 물건을 단돈 100엔에 살 수 있는 '100엔 숍', 인터넷 쇼핑몰 '라쿠텐' 의 등장, 편의점 세븐 일레븐의 성공, 유통업체와 택배업체의 결합에 따른 서비스 개선 등으로 유통구조와 시장이 변했다. 그 결과 이제는 소비자들이 다시 주머니를 열 만한 환경이 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되살아나는 소비의 일등 공신은 이른바 '신(新)3종 신기(神器)'로 불리는 디지털 TV와 디지털 카메라, DVD 리코더다. 고객의 입맛을 당기는 신기술과 디자인이 지갑을 열게 한 것이다. 지난해 말 시작된 디지털 방송과 올 가을 아테네 올림픽도 이들 제품의 특수를 부채질한다.

가전제품 양판점 빅카메라의 도쿄 유라쿠초점은 평일인 지난 11일에도 3000여평의 매장에 손님이 가득했다. 이곳 에사카 다카시 주임은 "디지털 TV의 매출이 지난해의 2.5배로 늘었다"고 말했다.

하쿠호도 생활종합연구소의 나카무라 연구원은 "주로 10대와 20대에게 인기를 끌던 디지털 제품이 최근에는 40~50대 이상 중장년 세대의 구매 욕구를 자극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유통업계는 2차 세계대전 직후에 태어난 베이비 붐 세대에 큰 기대를 건다. 1947~50년에 매년 250만명씩 태어난 1000만명이 몇년 안에 은퇴를 시작한다. 이들은 자기 집이 있고, 자녀 교육을 마쳤으며, 거품 붕괴 이전에 어느 정도 부를 축적한 계층이다. 또 연금을 제대로 받을 수 있는 복받은 세대로 통한다. 2차 베이비 붐 세대로 불리는 이들의 자녀는 지금 20대 후반~30대 초반으로 내집 마련에 나설 새로운 주택 수요층이다. 소비가 살아나면서 일본의 상징이던 높은 저축률이 낮아지고 있다. 98년 10.2%였던 것이 2002년에 6.2%로 떨어진 데 이어 올 상반기는 5%대를 보일 것으로 예측됐다.

"은퇴를 앞둔 여유있는 50대와 그 자녀 세대 및 여성을 중심으로 소비가 살아날 것이다. 이들을 겨냥한 건강관리와 여행.외식(요리) 등 서비스업 중심의 새로운 시장이 나타날 것으로 본다."(오카다 구니히코 나고야 상공회의소 부회장.마쓰자카야 백화점 사장)

다카시마야 백화점의 오조노 가즈히로 광고과장은 "뒷주머니를 약간 올려달아 다리가 길게 보이도록 만든 1만6800엔짜리 남성 면바지가 4월에만 몇백벌 팔리면서 히트를 했다"며 "소비 심리를 조금만 자극하면 이제 고객들은 지갑을 열 준비가 돼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일본 경제 거품 붕괴의 주범으로 지목돼온 부동산 경기도 일부 지역에서 살아나고 있다. 지금도 전국의 평균 땅값은 내리막길에서 벗어나지 않은 상태다. 그런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도쿄 도심 일부 재개발 지역에서는 땅값과 집값이 오르고 있다.

스미토모 신탁은행의 가네키 도시키미 차장은 "도쿄 도심은 다시 부동산 거품이 나타나는 것 아닌가 걱정될 정도"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같은 부동산 가격 상승세가 전국으로 번지지는 않으리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거품 붕괴 과정에서 토지에 대한 불패 신화가 깨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확실한 수익성이 보장되는 경우에만 투자가 이뤄지지라는 관측이다. 실제로 도쿄에서도 긴자.시나가와.시오도메.롯폰기 등 일부 지역만 값이 올랐다.

양극화는 부동산뿐 아니라 소비시장에도 나타나고 있다.

"불황기를 통해 승자와 패자가 뚜렷해지고 중산층이 붕괴되면서 많은 사람이 앞날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같은 계층의 양극화는 지속적인 경기 회복을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와나미 히로키 하쿠호도 생활종합연구소 주임 연구원)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도 여전하다. 백화점 매출도 도쿄.나고야 등 대도시는 괜찮지만 지방 중소도시에선 계속 줄고 있다. 다카시마야 백화점은 올 초 4개 지방 점포를 구조조정했다. 미쓰비시 신탁은행의 와다타베 미쓰기 기획부장은 "지방의 땅값이 계속 떨어지고 지방 기업들이 도산하면 모처럼 맞은 소비 증가세도 다시 주춤해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도쿄.오사카.나고야=특별취재팀

◇특별취재팀=김정수 경제연구소장, 양재찬.신혜경 전문기자, 이종태.김광기 기자, 김현기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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